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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이한열문학상 소설부문 - 이주아, <두리반에서>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9-04-12 15:14:20 조회 : 1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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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반에서

 

                                                                                                                                                                   이주아

 

어디론가 가야만 했다. 그냥 걷기 위해서. 차가운 밤바람이 거칠게 불었고 코트 자락이 나부꼈다.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면서 길거리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고 화를 누그러뜨리는 건 오래된 습관이었다. 종로든 홍대든 상수역이든 가로수길이든 일과가 끝나면 지하철에서 내려 마구 걷기 시작했다. 물기 없는 건조한 머리카락은 곧 바스러져 부서질 것처럼 퍼석했고 볼은 뾰루지가 따끔거렸다. 화장을 하나 마나 윤곽의 꺼진 부분이 하나도 메워지지 않아 들뜬 파운데이션이 얼룩지거나 그마저 지워지고 각질이 벗겨져 나왔다. 손대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만 같은 나날들이었다. 차비가 없어 지하철을 못 탈까 봐 가까스로 마련해 두었던 신용카드를 찍자 매달 후불로 빠져나갈 만만치 않은 비용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밤바람이라도 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중압감에 익사할 것만 같았다.

상수로 가야겠다는 작정이었는데 발길이 걷고 싶은 거리 쪽으로 옮겨졌다. 밤이 깊을수록 인파가 몰릴 것이었다. 걸음이 바빠졌다. 코끝이 빨개지도록 한파는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오직 방한을 위해 장만한 두꺼운 오리털 파카 깃을 잔뜩 세워서 움츠리고 걷는데도 파고드는 바람이 매서웠다. 거센 바람 때문에 포장마차의 비닐 천막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추어졌고 떡볶이 위로 모래와 낙엽 부스러기가 덩달아 들어갈 것 같아 오뎅도 핫바도 먹을 생각을 못하고 고개를 숙여 걸었다.

상수역까지 꾸역꾸역 걸어서 하카타분코 근처에 왔지만 딱히 들를 만한 곳은 없었다. 저녁도 들기 전에 커피를 마실 수는 없잖은가. 어디선가 담배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한곳에 더 서 있을 수 없어서 길거리 음식이라도 먹을 요량으로 발길을 돌렸다. 골목으로 들어가 몇 바퀴를 더 돌았고 9시가 가까워 왔다. 열 시까지는 먹고 돌아가야 될 터였다. 자정이라도 넘겼다간 어떡할까, 눈앞이 아찔했다. 옷가게에서 비쳐드는 불빛과 알록달록한 색상의 옷들이 요란하게 상점 앞을 어지럽혔다. 끝없이 이어지는 음악이 흐르고 휘황한 불빛과 살점을 파고드는 추위가 번갈아 번뜩이며 공격하는 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생활고로 예능 프로에 자주 출연하는 오래된 힙합 그룹의 공연을 예고하는 초대형 현수막이 볼품없이 펄럭이는 클럽 건물을 지나 설렘 하나 없는 저녁 식사를 치르러 카페에 들어갔다.

간단한 주문 절차를 마치고 앉을 자리가 없나 두리번거렸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가방을 먼저 놔두고 왔어야 하는데 아차, 벌써 만석이 됐을까. 다시 도로 위의 행렬에 떠밀려야 할지 몰라 재빨리 2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다행히 한 자리 정도는 비었지만 남의 귀엣말도 들릴 정도로 테이블 사이가 좁았다. 그러고 보니 주말이었다. 금요일이었던 것이다. 빵을 짓이겨 입속에 구겨 넣고 책을 꺼냈다. 반쯤 읽다 만 책을 반 페이지 정도 읽었을 때부터 눈이 감겼지만 다시 추위 속을 통과할 자신이 없었다. 옆 테이블에선 남자 둘이 여자 얘기를 꺼냈고 독서에 집중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었다. 글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시야가 흐려졌다. 끔벅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만큼도 평화롭지 않은 최신 가요 메들리의 굉음이 더는 들리지 않았다. 왁자지껄한 말소리도 점점 작게 들렸다.

얼마나 흘렀을까. 혹시 침을 흘리고 잔 건 아니겠지. 입가에 흐르는 차가운 것이 없는지부터 확인했다. 테이블에 한쪽 팔을 걸치고 얼굴을 파묻었는지 어깨부터 팔까지 저리고 쑤셨다. 히터 바람을 정통으로 맞고 독서실에서 자다 일어난 여고생처럼 퉁퉁 부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간격이 삼십 센티미터도 안 되는 옆 테이블 회사원들이 나를 보고 얼마나 비웃었을까. 쪽팔려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지만 사방을 둘러보니 손님들은 다들 저마다의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노트북 컴퓨터를 펴놓고 공부하는 커플 한 쌍, 수다 삼매경에 빠져 지칠 줄 모르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십 대 후반의 여자 둘, 구석진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는 여대생 하나. 저마다의 주말 저녁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설사 누가 홍대 내로라하는 카페에서 침 흘리며 자는 걸 보아도 아랑곳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전철역까지 가는 동안 무지막지하게 불어 닥칠 혹한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방을 챙겼다. 영하 삼십 도라도 끄떡없는 눈의 여왕이라도 되고픈 심정이었다. 다시 내던져진 거리에는 매년 기록적인 저온 현상에도 불구하고 스타킹에 미니스커트만 입은 여성들이 잽싸게 활보했다.

눈을 뜨니 주말의 오후를 맞이하였다. 빨래와 엊그제 밤에 먹은 비요뜨 용기, 포카칩 나초 소스가 책상 위에 나동그라져 있다. 부재중 통화 세 통. 직접적인 결석 사유로는 부족할 늦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도로 누워서 바닥으로 질질 끌리는 이불을 추어올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적당한 구실이 없을까. 매번 지각에 매번 똑같은 이유. 오전 11시까지 1시간 걸리는 홍대까지 나가는 게 왜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오전 9시기상은 고사하고 오전 1130분 기상도 지키기 힘들었다. 오전의 여유라는 것은 온데간데 없고 눈뜬 후 머리 감기와 편의점 커피와 택시만이 출근을 지탱해 주는 유일한 뼈대였다.

빨래를 넣어둔 비닐봉지를 주워서 세탁기에 집어넣고 세수를 하고 걸레로 바닥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닦고 침대나 이불에 음식쓰레기가 떨어지진 않았는지 면밀하게 조사했다. 이제 탈수까지 50분 동안 시간을 죽이든 때우든 해야 하는데 마땅히 적합한 선택 사항이 없다. 밥이라도 먹고 들어와야 어지럼증이 좀 가실 것 같다. 화장기 없는 얼굴엔 핏기 하나 없다. 뭐라도 성의 없는 메시지라도 남기는 편이 좋을는지 몰라 빨래 돌리고 아침 먹으러 식당에 나왔다고 말을 전한다. 둘러댈 더 좋은 문구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들 늦게 모여서 이제 점심 먹으러 왔으니 얼른 나오라고 답문이 왔다. 반찬은 오이 무침에 조린 우엉뿐이지만 시켜 놓은 참치 찌개를 후룩후룩 마시고 김밥 전문점을 나섰다.

도착한 버스에 음악을 들으면서 올랐다. 주말에 한껏 차려입은 연인들과 초라한 행색의 아주머니들이 어수선하게 뒤섞였지만 한눈에 누가 종점 근처의 저소득층이 사는 동네에서 탔고 누가 나들이 가는 대학생인지 알 수 있었다. 서서히 성북의 못사는 동네를 벗어나 중심가로 접어들자 깨끗하고 반듯한 건물들이 채광 좋은 대로변에 잇달아 나타났고 한 무더기의 승객이 내렸다.

모퉁이를 돌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카페바인이라는 카페였는데 <복음과상황>이라는 기독교 잡지 사무실을 겸하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모두는 각기 다른 지역에서 왔지만 같은 기독교 동아리 출신으로, 단체의 리더 격인 성직자가 홍대에서 개척한 교회에서 만나게 된 이십 대 청년들이었다. 힙스터 문화의 집결지인 홍대에는 해당 단체의 중앙회가 있어서 자연스레 홍대로 모이곤 했다. 늑장을 부린 데 대한 멋쩍은 미소라도 지으면서 입장해야 할까 천연덕스럽게 아무렇지 않은 듯이 태연을 가장해야 할까. 지각을 수없이 해도 그럴싸한 대안이 없다. 할 수 없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어 일행이 모인 곳에 앉기로 한다. 주말 오전의 카페 한구석에 썰렁하게 세 사람만이 자리를 덥히고 있었다. 전날 가게를 정리하고 철수한 직후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그려볼 수 있을 정도로 영업을 개시했다고 보기엔 뭔가 너무 내부 장식이 부족하고 앉을 자리가 많았다.

어이, 드디어 왔군.”

, .”

밥 먹으러 안 가?”

좀 있다 가야지. 우리도 모인지 얼마 안 됐어.”

주문해야지.”

. 해야지. 갔다 올게.”

오전의 신선한 공기 냄새가 좋았다. 새벽의 내음 같은. 맡아본 지가 아주 오래되었다. 간단히 주문을 마치자 펄펄 끓는 페퍼민트가 나왔다. 손가락을 하나씩 대어보다가 찻잔을 감싸 쥐었다. 안경알이 금세 흐려졌다.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연애 얘기.”

누구?”

친구 하나가 턱짓으로 가리켰다.

....... 크크크.”

일동 모두가 킬킬대며 웃었다.

크크크.”

?”

어어.”

어어. 알았어. 크크.”

S에게 씩 웃어 보였지만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일행이 애인의 존재와 필요성에 대해 토론하는 동안 혼자 딴생각에 잠겨 차를 마셨다. 혈액 순환이 잘되지 않아 손톱 끝이 거뭇거뭇한 짧은 갈색 줄들로 뒤덮여 칙칙했고 보기에 흉했다. 뜨거운 물주전자에 손끝이 닿으면 몇 초간도 지속하기 힘들 정도로 뜨거웠다.

우리 밥 먹으러 안 가?”

참다못해 내가 운을 뗐다.

가야지.”

시계를 힐끗 보며 누군가가 한 시가 넘었다고 얘기한다.

밥 먹으러 가자.”

그래. 배고프다. 이제 일어나자.”

뭐 먹지?”

한 팔을 외투에 꿰며 물었다.

몰라. 나가서 정하자. 양휘자는 빼고. 너 이번 주에 너무 많이 먹었다며.”

그래, 뭐 그럼 순대국밥 아니면 돼지백반집이겠구먼.”

그러든지.”

뭘 먹든 상관없다는 투로 나머지 두 명은 아무런 의사 표시를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았다. 우린 친하지 않았다. 친해지기 위해서 의무적으로 나오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뛰어들기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지켜보는 성격의 종교 모임이었다. S는 기독교교육 전공이지만 음악가가 되고 싶어 했고, 무엇보다 홍대를 좋아해서 집은 경기도지만 빨간 광역버스를 타고 매일 홍대를 왔다. L은 퇴폐적인 미술 전공자였는데 아이패드를 들고 다니면서 우리가 공동으로 경유한 동아리 중앙회 미디어팀을 기웃거리며 용돈벌이를 했다. O는 그나마 나랑 비슷하게 평범한 학과인 독문과를 나왔는데 학사장교 복무 중인 목회자 아들이어서 언제 교회를 떠날지 몰랐다. 그리고 소설 쓰겠다고 서울 온 지 몇 달도 안 돼서 정신 못 차리는 나. 말 그대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친구들이었고 기댈 데라곤 없었다.

예상대로 찬바람이 불어 닥치는 길바닥에 내쫓기듯 나왔지만 달리 갈 곳도 없었다. 추우니까 일단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서서 코트 자락에 파묻혀 밥을 얼른 먹었으면 좋겠다고 되뇌었다.

그 이후로 뭘 했는지 모르겠다.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긴 먹었겠지. 사고와 판단을 정지한 채 모든 결정을 일행에게 맡기고 떠밀려 다니다보니 늦은 오후였다. 하나둘씩 집으로 떠났고 O와 단둘이 남았다. 친구는 두리반에 가보겠다고 했고 나도 그러자 했다. 그렇게 일찍 고시원에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두리반에는 주말마다 인디밴드의 공연이 열렸다. 홍대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철거되어서 골조마저 다 드러날 듯이 칠이 벗겨진 벽에서 찬 기운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둥그런 테이블 위에는 막걸리가 놓여 있고 악기를 설치하기 위해 공연용 전선이 길게 풀어져 땅에 떨어진 머리카락처럼 엉켜 있었다. 시작될 공연이 어떤 장르의 음악을 하는 팀인지 사전 지식이 없어서 밤섬해적단이라든가 한받, 게으른 오후 등이 붙여진 시간대별 일정표를 보았으나 밴드 이름이 풍기는 느낌으로는 음악적인 성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런 데서 꽤 많은 이들이 공연을 하거나 들으러 온다는 것이 의아했고 서교동 저 안쪽의 클럽들과는 부드럽고 아기자기한 소규모 음악회와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

너무 쎈 음악이면 어떡하지? 자신 없는데.”

그러게.” 내심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던지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돌아왔다.

헤비메탈에 가사 없이 몇 분씩 기타 긁는 소리만 나면 안 되는데. 도망가고 싶지 싶다.”

몇 시까지 있을 거야?”

아홉 시쯤.” 다행히 아홉 시까진 대략 한 시간이었다. 그 정도는 배겨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러자. 그때는 나두 가야해.”

, .” 돌아갈 곳이 없는 국제적 미아가 된 기분이 들었다. 고시원에 가기 싫어서 남아 있긴 했지만 사회적 활동의 핑계로 더 이상의 귀가를 늦출 수 없는 야심한 시각이 되면 울고 싶어졌다. 돌아갈 수도 돌아가지 않을 수도 없는 난민처럼.

음악이 시작되려는지 방수재질의 빨간색 올인원 점프수트를 입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남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자신은 한받이며 인근 지역에 일어난 일에 대해 모른 척할 수 없어서 농성장을 찾게 되었다는 인사말을 전했다.

나는 몸을 옹송그리고 다리를 오들오들 떨면서 손뼉을 치다 추워서 손을 다리 사이에 집어넣었고 그러는 사이 다른 노래로 바뀌었다. 어떤 가수는 여느 락스타와 다름없이 가죽 재킷에 블랙진을 입고 머리를 사정없이 흔들었고 앉아 있는 여자들은 그루브를 타면서 환호해주었다. 시계를 힐끔거리니 820분이었고 9시가 과연 올까, 의문스러웠다.

때마침 친구에게서 전화벨이 울렸고 집에서 빨리 오라는 호출처럼 들렸다. 한 번 더 시계에 눈을 주자 45분이었다. 소란하지만 사무적인 샤우팅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참 모두가 할 말이 많구나. 오늘 외에 이 자리가 아니라도 절실한 목소리를 가지고 불리어지는 노래가 얼마나 될까.

공연장을 빠져나와 지하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93분이었다.

아홉 시 삼분이네. . 시간 맞춰 나왔다. 죽을 뻔했네. 중간에 도망치고 싶으면 어떡할지 정말 걱정했어.”

마찬가지로 친구도 동조의 웃음을 보내왔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싫지 않았다.

집에 갈 거지?”

. 가야지.”

고시원 가기 싫다. 바깥에서 나다니는 거 싫은데 집에 들어가기는 더 싫어.”

“.......”

그래도 가야지. 지하철 탈 거지?”

타이르는 O의 재촉을 받으며 총총 걸어간 곳은 2호선 홍대입구역 앞이었다. 오늘 같은 한파에 변변한 방석도 없이 맨바닥에 앉아 있으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추울 텐데 걸인이 무릎을 꿇고 매우 숙달된 모습으로 손을 포개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먼젓번에 본 이름 없는 가수들이나 저 걸인이나 나나 무슨 다를 바가 있겠는가. 아저씨, 오래오래 사세요. 마음속으로 자그맣게 축복을 빌어주고 계단을 내려갔다.

시청을 지나 1호선으로 갈아타자 왈칵 참았던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가린 두 손 사이로 눈물과 함께 하루의 얼룩처럼 남은 화장기도 함께 씻겨 나왔다. 잠깐 사이 손바닥이 흥건하게 물기가 번졌다. 청바지에 손을 닦자 손자국이 그대로 찍혔다. 안경 안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그치지 않고 꽤 오래 내려왔던 것 같다.

방문을 열었을 땐 11시가 지나있었다. 베개를 끌어안고 곤두선 신경을 달래려고 컴퓨터에 이어폰을 연결하고 누웠다. 2평 남짓한 방 안에 모니터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빛과 음악 소리가 가득 찼다. 눈을 감았다. TV에선 쇼의 진행자와 패널들이 출연자의 사소한 취미생활을 묻고 답하며 소란스레 웃어댔다. 고가의 옷에 두꺼운 화장으로 주름을 가린 중견 연기자에게 너나 할 것 없이 퍼붓는 칭찬세례가 이어폰을 꽂는 순간 일시에 끊겼다. 내일도 오후에 두리반을 들러야겠다는 다짐을 굳혔다. 쇠락한 선술집 같은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삐죽하게 수염을 기르고 회색이나 고동색 계열의 바람막이 차림이라서 옷에 때가 묻어서 우중충한 건지 옷감의 염료가 원래 그런 건지 얼른 봐서는 알아보기 힘든 행색의 남자들이 지저분한 탁자 앞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줄담배를 피워 물어도 어쩐지 참을 만했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이불로 뭉친 고치를 빠져나오자 현기증이 밀려왔다. 씻고 나서 앉으면 어김없이 다가오는 미미한 어지럼증이었다. 방금 잠에서 깬 것처럼 머리가 무겁고 지끈거렸다. 교회에 가면 늘 지각이었다. 작은 교회지만 항상 많은 사람 속에서 헤매다가 돌아오곤 했는데 소모임이 끝나면 빠져나갈 구멍이 생겨서 기뻤다. 지역을 옮겨 살기 시작한 후로 타인에게 경계심을 늦추지 못하던 내가 외면할 수 없는 친근한 사람들을 찾은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의 틀에서 비교를 당하던 입장에서 내가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찬바람 부는 언덕에서 아파하고 있는 두리반에 잠시 묻어갈(야비한) 궁리를 하며 위험천만한 불량배와 난봉꾼들이 우글거리는 오늘의 서울과 마주하기 위해 홍대로 출발했다. 휴일의 도로는 안온하고 햇볕은 거침없이 모든 것을 들추어낸다. 고요하게 자박자박 내리는 햇살 속에서 부유하는 먼지 알갱이들을 세어보다가 문득 미미하게 떠는 꽃잎처럼 가라앉는 그것들이 아름답게 보인다.

점심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 당도한 두리반에는 어린 신입생이 대기하고 있었다. 요즘은 하루가 다르게 십 대 아이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다. 하고 있는 인디 밴드 공연이 잘돼서 곧 대규모의 행사도 준비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요 며칠 사이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왔다는 독립영화 감독도 생기고 전직 기자도 상주하러 와서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보내준다 하는데 아마 농성에 보탬이 될 모양이다. 게다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대안학교를 다니는 고등학생들이 공연을 보러 왔다가 살면서 농성 일정표도 짜고 밥도 해 먹고 공연기획을 하면서 지낸다고 한다. 오늘은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몇 봉지를 사 왔다. 내가 평소 예뻐서 눈여겨 봐둔 어린 아가씨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떡볶이와 순대를 집어 먹는다. 생글 볼에 우물을 만들어 웃는다. 순간 으쓱해지며 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헤헤, 겸연쩍은 눈인사를 했다. 원체 들락거리는 인원이 많아서 어느새 떡볶이가 다 사라지고 없다. 여기 사람들은 간식거리가 부족해서 뭘 사와도 잘 먹는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문이 열릴 때마다 못 보던 이들이 변화무쌍하게 방문해서 춥지 않았다. 처음 방문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인테리어라고는 갈라진 벽과 냉랭한 바닥뿐이었다. 귀신이 튀어나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사람이 사는 곳 치고는 갈라진 나무조각투성이여서 보수 공사라든가 수리를 좀 해야 그나마 자리를 펴고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6개월 전에는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개 삼아 펴고 그 위에 전기장판을 켜놓아 땅바닥에 앉을 수 있게끔 마련해놓고 한쪽에는 잿빛으로 변색된 원통형 흰색 탁자와 플라스틱 의자 두어 개가 있었다. 탁자 앞에 앉아 있노라면 철거 초창기라 여기저기 깨진 창유리며 출입구에 바른 청테이프 자국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두리반은 공항 철도가 들어온다고 하는 통에 땅값이 열 배로 올라 건물주가 강제로 내몰기 전까지 네이버에 맛집으로도 소개되어 장사가 잘되던 칼국수 가게였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했어도 정치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용산 사태라든가 재개발 지역에서 벌어지는 개발업자들의 투기성 행태 같은 일련의 시나리오를 모르는 나로서는 왜 주인이 가게 문을 닫고 셔텨가 내려진 건물에 들어가 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수심에 찬 낯빛을 보고 이유를 대신했다. 방문을 권유했던 O는 거의 첫 손님이나 다름없었고 나는 그즈음 함께 어울린 그의 몇 없는 동갑내기 친구였으므로 곧 농성 지지자가 되었다. 철거민이 그에 반대하는 농성을 펼치려고 야밤에 창문을 뚫고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심각하고 무서운 일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처음 접하는 일이라 어디까지 실제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국에는 건물에 세 들어 개업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본전도 못 찾고 쫓겨날 경우 대처할 관련법이 없고 소송을 한다 해도 세입자가 권리금을 돌려받을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후에 알았고 뒤이어 그러면 외국에서는 국가에서 살 방법을 내주나요?” 천진하게 물었다가 머쓱하게 웃던 날이 있었다. 그날이었던가, 제발 아닐 거라 믿고 싶었지만 내가 사는 세상 어디인가엔 조직폭력배가 아니라도 힘없는 사람에게 겁을 주고 주먹질하는 걸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어쨌든 두리반엔 어두운 밤을 틈타 용역들이 건물을 부수고 들어와서 사장님 내외를 두들겨 팰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서 거기엔 항상 선량한 시민이 가득 들어차 있어서 그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했다. 안 그러면 누가 쥐도 새도 모르게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고. 팔뚝 굵고 우람한 20대 남자들이 별안간 들이닥쳐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청테이프로 겨우 도배를 마친 깨진 유리창을 엉망으로 만들 상상을 하니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너무 무시무시하고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따가 나가서 저녁 먹을까?”

먹어야지.”

S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래. 먹어야겠지? 떡볶이로는 밥이 안 돼. 그럼 뭐 먹을 거임?”

........” 아무도 말이 없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음식 메뉴를 정하는 오후. 적극적인 S도 입을 다물고 기타를 치고 있다. 레퍼토리 중의 하나인 본능적으로를 치는 중이다. 이 아이는 제 말마따나 본능에 충실한 아이인데 먹으러 갈 때는 메뉴 선정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럼 뭐 또 김치찌개 먹을까?”

그러든가.” S가 무심히 끼어든다. “그래. 그러지 뭐. 이따 다섯 시 되면 나가자.”

봄이 오려는지 발이 시리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를 앉아 있다 자리를 뜨는데 세월의 더께가 소복하게 덮인 것 같던 사장님도 한층 환해진 것 같았다. 웃으시는 걸 본 적이 있던가, 더듬어 보게 되는 그런 잔잔한 미소였다. 평상심을 유지하기가 힘들 텐데 어디서 저런 버티는 힘이 나올까, 먼발치에서 기억이 나면 우러러보게 되었다.

홍대를 벗어나기 위해 무심결에 걸었다. 갈 곳은 없지만 먹을 데는 많았다. 각자가 침통한 두리반의 대기권에서 못 빠져 나왔는지 시무룩하게 터덜터덜 걸음만 옮겼다. 누구나가 와서 광란의 파티를 하고 돌아가지만, 가난뱅이 행인에게는 더없이 불친절한 이곳을 털어버리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그 아우성을 싫어해서 두메산골로 들어가 논두렁에 누워 풀이나 뽑으면서 지내길 원했다(적어도 표면상으로는). S는 광주의 대안 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신학생, L은 강원도 강릉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대학원을 서울로 옮긴 미술학도, 유일하게 친구로 생각하는 O는 명문대를 나온 학사장교였고 나머지는 나였다. 그들은 시시때때로 서울의 거대함과 상업성을 불만 섞인 말투로 내뱉었고 서울살이의 조금만 잘못 디뎌도 생애 통째로가 망가질 것 같은 위태로움을 벗어나서 언젠가는 지방에 내려가 귀농할 거라고 자못 심각하게 말하곤 했는데 그게 진심인지 아니면 잘난 사람이 많은 이곳에서는 생존 경쟁이 치열하니 차라리 비교 대상에서 제외되고 싶다는 말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거대도시는 이따금 그 괴물 같은 몸집을 불리며 그 끝을 모르는 욕망으로 뭐든 집어삼켜서 제 것으로 만들고야 마는 악마적인 생명력이 있었고 난 그게 무서웠다. 가로수에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취객의 토사물에도 불구하고, 퇴근 전까지 시각을 다투며 끝마쳐야 될 업무에 쫓기다가 가까스로 풀려나와 바깥바람이나 쐬면서 머리나 식힐 참이면 지하철 전광판엔 반쯤 벗은 유이가 소주잔을 들고 허벅지를 드러내고 있었고 대다수 군중들의 머리는 그쪽을 향했다. 그쯤 되면 속세를 떠나 훌훌 털어버리고 여우 굴에라도 들어갈까, 견적을 뽑게 된다. 허리가 끊어져도 좋으니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밭이나 매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따위의 공상인데 물론 그게 다 이뤄지길 바라는 건 아니다. 법과 제도니 관공서 같은 것들이 얼마나 관료적이고 근엄하며 권위적이고 불친절한지 다 열거하지 않더라도 어딜 가나 사람이 많으면 불쾌하고 여러 가지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워진다는 것쯤은 모두가 다 아는 거니까. 나란 인간이 서울이라는 거대한 기계를 굴리기 위한 보잘것없는 부속품처럼 느껴지는 것은 논리적인 귀결이랄까. 그래서 우리가 홍대에 오는지도 몰랐다. 이젠 상업화에 희생이다 뭐다 해서 돈이 몰리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붙는 자본 때문에 그마저도 없어져가지만 홍대는 가난한 글쟁이들이 카페에서 글을 쓰고, 버스킹하는 밴드들이 수시로 오가며 곰팡이 핀 녹음실에서 합주하는 게 유일하게 공인된 무중력 공간 같았다. 빈털터리로 산울림 소극장을 지나도 아무 하자가 없을 것 같고 출판사들이 밀집된 구획을 끝없이 돌다가 길가에 앉아 막걸리병을 들고 신세한탄을 해도 되는 스티커를 발부받은 것 같은.

트위터 계정에 등록을 하고 컴퓨터를 켰다. 병주가 시시때때로 급박하게 돌아갈지도 모를 일에 대한 공지를 올렸고 자립음악가들이 열성적으로 알티를 눌렀다. 우리들의 자립음악은 커져갔고 두리반의 깨진 빈 벽 조각들 사이엔 병주가 그린 그림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어느덧 교회 마치고 두리반에 가는 건 자연스레 일과가 되었고 나는 병주 안색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유난히 꽃샘추위가 긴 해였지만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10시에 일어나 11시까지 홍대에 가보겠다고 부산을 떨며 서쪽으로 향했다. 뜨거운 히터 바람을 맞고 멍하니 앉아 있으니 예배가 끝났다. 최소한의 인사치레만 하고서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신호등이 바뀔 때 그대로 지나쳐 가려다 뭔가 빼먹고 온 마음이 들어 두리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는 길에 두리반에서 열리는 대규모 행사 전단지가 심심찮게 붙어 있었다. 도착해보니 한쪽 탁자에 홍보용 종이가 수북하게 쌓여 있고 깨알 같은 글씨로 참석 가수들이 50개도 넘게 인쇄된 초대용 엽서가 보였다. 노동절을 기념으로 큰 행사가 열릴 예정이었다. 주말에 하는 자립음악가들의 공연이 입소문을 타서 동네 인디밴드들의 집결지가 된 모양이었다. 준비는 활기를 띠고 바쁘게 돌아갔다. 50개가 넘는 밴드들이 협조에 응해주어 상당히 많은 부가 수익과 홍보 효과를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이 많은 밴드들이 와준다고?

실내에는 이제 스물이 채 안 된 아가씨들이나 갓 소년에서 벗어난 새로운 방문객들로 왁자지껄했다. 의자에 앉아서 기타를 치거나 젬베를 두드리며 여럿이 모여 앉아 까르르 웃어대는 건 이제 우리만이 아니었다. 때마침 출입구 앞에서 직업활동가 조약골, 회기동 단편선, 병주가 자리를 잡았다. 조약골은 기타를 잡았고 단편선은 노래를 하고 병주는 춤을 추었다. 행인들이 철거를 거부하는 요란한 문구가 지저분하게 휘갈겨진 건물 외벽을 흘끗거렸고 병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흥겹게 어깨를 들썩이며 아이처럼 뛰놀았다.

다음에 왔을 땐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랍지 않은 게 없었다. 노동절에 있었던 공연에 2000명도 넘는 사람들이 와서 춤을 추다가 새벽 서너 시에야 돌아갔다고 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막걸리병과 쌓여 있는 맥주 궤짝이 얼핏 보아도 상당량이었다. CD플레이어에서는 자연스럽게 왔다 간 가수의 히트곡이 흘러나왔고 흥분이 채 식지 않은 스태프들의 분주한 손길들로 열광적으로 달아올랐던 무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병주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여차하면 흥이 올라 춤을 출 기세로 지난밤의 대단했던 음악과 연주에 대해 신이 나서 재잘댔다. 어떤 음악이 어떤 시간에 흘러나와서 얼마나 소리를 질러댔던지 목이 다 쉬었다며 투정 조로 하소연했지만 하도 웃어서 배가 아파 더는 웃을 수도 없음에 대해 늘어놓는 볼이 발그레했다.

알은체하며 가늘게 웃었지만 흥미롭고 고조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가서 나도 이어폰을 꽂고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교회를 통해서 가는 게 아니라면 자정이 넘도록 술에 취해 흔들어대는 그 무리에 은근슬쩍 섞이고 싶었다.

그날은 집에 가는 길에 핸드폰으로 프리템포의 뷰티풀 월드를 다운로드해서 비트가 세질 때마다 발을 까딱거렸다. 430초의 별나라가 쿵짝거렸다. 홍릉에 내려서 경희대 인근의 고시원까지 닭강정 2000원어치를 우적거리면서 뜻을 알 수 없는 외국어로 콧노래를 불렀다. 밤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달빛은 따뜻했다.

병주와 몇몇 친구들은 그 이후로 두리반에 짐을 풀고 숙식을 시작했다. 나도 그곳에 전보다 한층 정기적으로 드나들었다. 난 그곳을 초창기에 찾은 사람들 중 하나였지만 차츰차츰 찾는 이가 늘어나 비어 있던 방엔 철사로 줄을 매단 조명이 꾸며지고 들어와서 사는 사람들이 생긴 것에 익숙해졌다. 농성은 200일이 넘어가고 사장님의 신간 소설이 출간되었으며 병주와 조약골과 단편선은 트위터에 매일의 변동 상황이나 경과를 실어 날랐다.

인천 공항 철도가 홍대 인근에 들어선다는 소문이 돌자 두리반이 있는 건물을 시가의 8배에 매입한 건 GS의 계열사였다. 유령회사를 만들고 바지사장을 고용해서 두리반의 철거를 재촉하고 용역을 부려 협박을 일삼았다. 틈만 나면 강제철거를 할 것처럼 어깨들을 포진시키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트위터에는 비상사태를 알리는 빨간불이 켜졌다. 다행히 홍대 인디씬들이 총출동하다시피 출연해 노동절 행사 참석자가 3000명에 달하자 농성이 점점 유명세를 타고 힘을 얻어서 용역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되었다. 암울했던 분위기가 즐거운 쪽으로 조금 바뀌었다. 그렇다고 합의금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지는 못해서 섣불리 낙관적인 예상이 커다란 욕망으로 폭발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래도 주말의 공연은 계속되었고 초반에 자주 왔던 밤섬해적단이나 야마가타 트윅스터가 다른 이름들로 교체되었다. 예전엔 밤섬의 <우린 씨발 존나 젊다>와 한받의 <돈만 아는 저질>을 자주 부르곤 했는데 목요일에 있을 칼국수 음악회에 시와의 방문 소식이 알려지자 인터넷 카페 게시글에 많은 댓글이 달리며 여러 사람이 환영을 표했다.

투쟁이 어느덧 장기전에 접어들고 있었다. 나는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홍대 인근을 배회하면서 시간을 때웠고 방문객들은 몇 시간에 한 번씩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하며 순번을 돌았다.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작가인 바깥 사장님을 후원하는 출판사에서 대량의 책을 헐값에 보내주어서 두리반은 작은 서점이 되었다. 분명히 영업이 정지되어서 망한 음식점인데도 기이하게 흥겨운 분위기를 이어갔다. 그런 보통의 일요일이었다. 집에 가려고 하자 어쩐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에 두리반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병주와 안 사장님이 잔뜩 성질이 나서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두리반 건물 뒤쪽 공터에 한옥이 한 채 있었는데 어떤 영화감독이 불타는 장면에 쓰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름이 깨나 알려진 인권 영화감독이었는데 나도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것 같았다. 찬물을 끼얹은 듯이 가라앉은 실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후 거구의 여자가 들어왔고 병주는 주변에 빨리 증인으로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이 있으면 어서 여기에 와달라는 문자를 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들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은 한쪽 구석에 쌓아둔 간이 의자를 모두 꺼냈고 휴대전화 수신음 하나 울리지 않고 뭐든 집어삼킬 듯한 적막 속에서 토론이 재개되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뒤이어 설전이 오갔다. 안 사장님이 감독이란 사람에게 퍼부어댔다.

어떻게 인권 영화를 한다는 사람이 우리 같은 사람한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는 겁니까? 사용 금지된 건물을 야밤에 뜯고 들어와서 불법으로 살고 있는 거를 겨우 입막음을 해놓고 이제야 맞아 죽지 않을 정도는 되게 해놨는데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병주도 감독을 흘겨보며 쏘아붙였다. “아니, 미친. 씨발!”

두리반은 불법점거 상점이었다. 영업 정지가 돼서 당장 용역이 장비를 들고 들어와서 건물을 뚫어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데 그나마 헐리지 않고 있는 건 전적으로 공연 때문이었다. 유 사장님이 속한 인천 작가회에서 보도 자료를 내고 홍대 한복판에서 인디 가수들이 집결해서 공연도 하면서 난리법석을 떨어서 최소한 인명이 다치거나 하는 일 없이 농성을 계속할 수나 있었다. 그야말로 영세세입자가 목숨을 담보로 내건 투쟁을 하면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중이었다.

영화 찍는다는 감독이 이제 와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안 사장님이 뒤이어 빠르게 쏟아냈다.

머쓱한 표정의 감독이 운을 뗐다.

저도 당연히 이해합니다. 저도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 당연히 마음은 이쪽이죠. 이쪽에 가까운 사람이지요.”

근데, 근데 왜 그러는 건데요? 저기 한옥을 아무리 영화 촬영이래두 불태워버리면 여기도 영향을 받는다구요." 사장님은 거의 울상이 되어버렸다.

지금 전국을 다 돌았어요. 다른 걸 다 찍어놓고 스톱하고 있는데 아무리 해도 장소 섭외가 안 돼서 찾고 찾다가 어디에 그런 건물이 있다, 저기 해서 온 겁니다. 지금 스탠바이 하는 배우, 스태프들 다 불러내서 찍고 해산하기로 하고 약속을 정했는데 여기서 또 걸리면 그 사람들 다시 불러내지도 못하구요.”

안 돼요.” 냉혹한 표정으로 돌아온 안 사장님이 말을 끊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글쎄, 안 돼. 아무리 그렇기루 사람이 살고 봐야지. 아무리 영화 찍는 게 중해도 우리만큼 절박해요? 우리는 지금 가진 거 다 내놓고 죽기살기루 하고 있는데.”

더이상 할 말 없습니다. 안 돼요. 안 돼. 안 돼. 그만 돌아가세요.”

안 사장님은 탁자 안쪽에 있는 감독을 덩그러니 남겨둔 채 2층으로 올라갔다.

황황히 그녀가 사라지자 구경꾼들은 털고 일어날지 가만히 잠자코 있을지 어쩔 줄 몰라 웅성거렸다.

모여든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떴고 나도 버스를 타러 신촌으로 향했다.

나는 그날 이후 감독이 되려 좋은 사람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당연히 저는 이쪽이라는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수세에 처했어도 이름난 감독이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어딘가 어눌한 말투로 조금씩 털어놓는 게 안심이 되었다.

한 주가 지나자 감독이 온 건 영화 때문이 아니란 풍문이 들려왔다. 두리반을 팔아넘긴 유령회사 사장과 아는 사이라서 중재를 부탁받았다고 했다. 또 한 번의 협상 테이블이 열띤 토론과 함께 벌어졌다. 무슨 일이 생길까 조마조마하게 몇 주를 기다렸지만, 두리반 측에서 영화 촬영을 허락한 것 빼고 달라진 건 없었다.

얼마 안 가 인부들이 공터에 촬영 준비를 하러 왔고 감독은 웃으면서 감사를 표했다. 우리가 비열하고 파렴치한 사기꾼이라고만 알고 있던 그 위인이 평상시에는 매우 선량하고 인간미 넘치는 이웃이라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밝혀졌고 감독은 자신이 중재를 서겠다고 자청했다. 두리반 바깥 사장님은 이 갑작스러운 중재 요청에 건설회사 측에서 대지를 매입하려고 천억 가까이 빌렸는데 내후년부터는 대출금 이자를 갚아나가야 해서 빨리 이 사건을 종결시켜야 그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수작을 부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공식적인 협상에 대한 제의는 농성을 시작한 이후 처음 들어온 것이라서 자못 기대하는 마음으로 추이를 지켜보았다. 다음 주 목요일에 건설회사 측의 대리인과 감독과 사장님 셋이서 삼자대면을 하기로 시일이 정해졌다. 현장에서 관련 내용을 들은 일동 모두는 긴장으로 얼어붙었고 술렁이기 시작했다. 정말로 합의를 해줄까?

궁금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라서 끊임없이 협상에 대한 생각이 밤잠을 뒤척였다. 셋이 모이기로 약속을 잡은 당일엔 초저녁부터 안절부절못하다 퇴근 후에 가볼까 말까 망설였다. 이틀이 지난 목요일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을 끝내고 습관적으로 종각 향하는 길에 맘을 바꾸어 2호선을 탔다.

왜 아무도 없지? 주인 없는 방에 몰래 들어온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안쪽으로 올라가는 층계참을 살피며 두리번거렸다. 캄캄한 실내에는 백열전구 하나만 매달려 희뿌연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극도의 긴장이 꺼지는 순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뭐라도 먹고 올까.

떡볶이를 파는 노점을 찾아 교차로를 건넜다. 평일에도 연일연야 인산인해를 이루는 저 안쪽의 홍대보다는 훨씬 한산했다. 축구철이라 지나가는 회사원들이 떠들썩하게 경기 내용을 중계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뎅이랑 튀긴 감자로 간단히 요기 후 간식거리를 사서 두리반으로 향했다. 홀에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지, 뒤져볼 수도 없고. 밤이 되니 영업 정지된 상점 특유의 음산함이 더해져 분명히 사람이 살고 있는 건물인 걸 알면서도 내부에서 인기척이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유리문 뒤쪽에 다행히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카즈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 인사하자 뜻밖의 방문객이라는 의아한 표정이 비쳤다.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손에 든 빵 봉지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무슨 행사가 없나 보죠?”

, 오늘은 영화 봐요. 다들 밑에서 영화 보고 있어요.”

, . 평일이라 조용하네요.” 카즈는 노트북에 무엇인가 열심히 적고 있었다.

뭐 하시나 봐요?”

, 저는 오마이뉴스에 두리반 기사 내려고 기사 쓰고 있어요.” 카즈는 직업이 기자였다.

, 저기 근데 일요일에 어떤 감독 다녀가지 않았어요? 작가 선생님이랑 셋이서 담판을 본다고.”

, 그거요? 그거 그냥 합의 안 하기로 했어요.”

왜요?”

우리 쪽에서 처음부터 회사 측에 요구한 건 합의금인데 안 된다고 하니까.”

, 그래요?”

나중에 물어보니 안졸리나졸리나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안 사장님도 그 사람들 말은 믿을 게 못 된다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나중에 가봐야 아는 거지.” 일축했다.

에이, 뭐예요? 그럼 합의가 아니지. 그럼 뭣 하러 합의를 하자고 해? 자기네들 돈 안 들이고 끝내겠다는 거잖아

그 사람들 눈 하나 꿈쩍 안 해. 자기네들 번거롭고 신경 쓰이고 하니까 빨리 어떻게든 해보려고 그런 거지. 합의는 무슨 합의여.”

, 진짜 못됐다. 뭐 하러 여기 들어와서 농성을 하는데? 권리금 되찾겠다고 그런 건데 고작 그런 거 물어보려고 삼자대면을 하자고 해? 정말 어이없다.”

결국 감독 좋은 일만 시킨 건가. 사태를 예의주시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던 일동 모두는 맥이 탁 풀렸다.

본격적인 여름철에 접어들었고 폭우와 폭서가 번갈아 찾아왔다. 내가 뜸했던 사이 한국전력이 두리반에 전기 공급을 중단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농성이 장기전으로 접어들자 두리반을 매입한 건설회사에서 한전에 전기를 끊으라고 압력을 준 모양이었다. 삼복더위에 사장님 내외분이 땀을 뻘뻘 흘리며 촛불을 열댓 개 밝혀 실내조명을 대신하고 있었다. 모 진보신당원이 승합차를 타고 와 트렁크에서 아이스박스와 얼음을 두세 봉지 꺼내 주자 지켜보던 이들이 모두 반기며 환호했다. 곧 회의 시간이 되었다. 앞으로 대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 급한 대로 자전거 발전기 몇 대랑 태양열 발전기를 빌려서 필요한 전력을 충당하기로 결정이 났다. 감독님이 그 건설회사가 내세운 유령회사 사장이랑 접선해서 좋은 쪽으로 해결이 나도록 도와준다고 했는데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세부사항이 복잡해져서 파악이 쉽지 않았다. 다시 지루한 싸움의 연장전이 시작되었다. 대기업의 횡포에 꿈틀하던 두리반이 이제는 한국전력이라는 국가 기관에 반기를 들고 생존권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암중모색이었다.

그러는 사이 두리반에는 자전거 발전기가 새로 생겼고 사장님은 밤마다 모기와 술래잡기를 하느라 체중이 줄어 주위의 안타까움을 샀다. 한전은 고집스레 전력을 내주지 않았다. 활동가 조약골은 시절을 견디려 옥외방송 라디오를 시작했고 수도 공급이 끊겨 머리도 제때 못 감았다. 샴푸와 린스도 동나서 상근자들 중에 머리 긴 여자 누구냐는 웃지 못할 농담도 쓸쓸히 오갔다. 계절은 가을로 바뀌고 가을은 늦가을로 바뀌었다. 안 사장님은 월동 준비로 연탄 100장을 주문했고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추위와 더불어 벌써 농성 1주년이 가까이 와 있었다. 방문객들은 농성 1주년을 예고하는 벽보의 기념 홍보 문구를 보며 말없이 가슴을 쓸어내렸고 운영위원들 또한 분주히 움직였다.

1년이란 시간 동안 용역의 철거를 당하지 않고 상가 건물을 지켰다는 것만으로도 전례 없이 경이로운 사건이긴 하지만 소송에서 진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위험이 미해결로 남아 여전히 위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그때 농성하길 잘했다고 뚫고 들어와서 큰소리라도 한번 안 쳤으면 얼마나 억울했을지 현재 우리가 건재함을 감사하고 앞으로도 무사하기를 마음속 깊이 빌었다.

역사적인 농성 1주년이 되던 우리 교회 식구들은 주일에 그릭조이에서 드리던 예배를 두리반으로 장소를 바꾸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압도적인 진실, 그 날선 무게 하나만으로 좌중을 침묵하게 만드는 유 사장님이 단상 앞에 섰다. 사장님은 농성 첫날 창유리를 뜯고 들어와 두리반에 잠입하기로 결정한 지난날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삼켰다. 안사람에게서 왜 우리가 이대로 주저앉아야 하느냐는 통곡 어린 호소에 마지못해 못 이긴 척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아내와 뜻을 같이 하기로 했다며 소매로 눈가를 훔치자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전기 없이 여름을 나느라 유난히 움푹 꺼진 뺨에 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홍대에 밥집을 개업하기까지 모아둔 돈을 다 집어넣고 큰형에게 오천만 원 대출을 받은 이야기, 대출받은 걸 이럭저럭 갚기까지 걸렸던 이년 여의 시간, 그리고 갑자기 날아온 채권양도통지서, 변경된 임대차계약에 서명하라는 강요와 협박에 이르자 나도 눈물이 났다. 목사님이 기도 제목 내고 기도하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펑펑 울었다. 아마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텐데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고, 이럴 수는 없다고 기도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꼭 이 기도만큼은 들어주기를 바랐다.

그해 봄이 지나고 이듬해 봄에 나는 대구에 왔다. 지독하게 추웠던 서울의 겨울을 지내고 나니 잇몸이 무너지듯 시리던 이도 나은 것 같았다. 대구는 늦봄부터 더웠고 집은 여전했으며 나는 질병과 호환 마마에게서 구원되었고 밀린 방세를 청산했으며 샴푸가 없어 퐁퐁이나 바디 클렌저로 머리 감는 일이 없어졌다. 잊을 만하면 돋아나던 성인여드름이 가라앉은 자리엔 흉터가 오롯이 남았다.

지금은 돌려받은 권리금으로 홍대 인근 어딘가 다시 문을 열었다고 한다. 인천공항과 홍대입구역을 잇는 경전철 옆에 있던 두리반은 이제 없지만 새로운 터전에서 멋진 칼국수가 빚어지고 있다. 나는 소설 쓰기를 그만두고 문학을 계속 공부하고 있다. 그때 함께 농성하던 친구들은 아직도 각자의 자리에서 연대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 돈만 아는 저질들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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