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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10시~17시


소개와 연혁

  • 기념사업회 소개
  • 기념비
  • 동판

소개

이한열 열사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86학번으로, 2학년이던 1987년 6월 9일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27일간 세브란스 중환자실에서 투병하다 7월 5일 세상과 이별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1987년 8월 ‘故 이한열 열사 추모사업회(회장 오충일)’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1989년 6월 ‘이한열 추모사업회(이사장 성내운)’로 명칭을 바꿨습니다. 이한열 추모사업회는 추모 사진집을 발간하고, 추모비를 연세대학교 학생
회관 옆 동산에 세웠습니다. 또한 그의 일기와 편지 등을 모아 추모 문집을 발행하였습니다.

2008년 그를 기억하는 몇몇이 모여 이한열장학회를 만들었습니다. 2017년 6월 현재 150명이 넘는 학생에게 2억 원이 넘는 장학금을 지급하였습니다.
2013년부터 연세대학교 교지인 《연세》지와 함께 ‘이한열문학상’도 공동으로 주최합니다. 매월 500여명의 후원회원들이 1만 가량의 후원금으로
만들어낸 성과입니다. 이한열장학회를 기반으로 2010년 사단법인 이한열기념사업회가 출범합니다.
이한열기념사업회는 매해 6월 9일 이한열문화제와 7월 5일 광주 망월동 그의 묘소에서 추모 예배를 진행합니다.

2004년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가족이 내놓아 마련한 터에 모금을 더해 이한열기념관을 세웠습니다. 이곳에서는 이한열의 유품과 87년 6월항쟁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2015년부터 ‘보고 싶은 얼굴’전을 통해 다른 열사들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걸어온 길

  1. 2016 . 6 . - 이한열 피격지점 동판 제막
  2. 2016 . 2 . - 기념비 도록 발간
  3. 2015 . 6 . - 이한열기념비 재건립
  4. 2014 . 1 . - 신촌 청춘 문화제 진행
  5. 2011 . 2 . - (사) 이한열기념사업회 창립식
  6. 2010 . 12 . - (사)이한열기념사업회(이사장 김학민) 행안부 승인
  7. 2010 . 6 . - (사) 이한열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 결성(준비위원장 김학민)
  8. 2009 . 3 . - 제 1회 이한열장학금 수여 이후 연 2회 장학금 수여 중
  9. 2008 . 7 . - 이한열 장학회 시작
  10. 2005 . 6 . - 이한열 기념관 개관
  11. 1989 . 11 . - 추모문집 『이한열, 유월하늘의 함성이여』 발간
  12. 1988 . 9 . - 이한열 열사 추모비 건립 이한열 동산 조성
  13. 1988 . 6 . - 이한열 추모사업회 결성(이사장 성내운)
  14. 1987 . 11 . - 故 이한열 열사 추모사업회(회장 오충일) 결성
  • 매해 6.9제 추모의 밤 진행
  • 매해 7.5 추도식 진행

이한열기념비 20150609

이 기념비는 1987년 6월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 시위를 하던 중 최루탄에 맞아 산아한 이한열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1988년 9월 14일 세워져 한열동산을 27년간 묵묵히 지켜온 옛 추모비가 세월의 무게에 손상되어, 여러분의 뜻을 모아 2015년 6월 9일 다시 세웠진 것입니다. 198769757922는 한 젊은이의 짧은 삶에서 안타깝던 31일간의 기록이며 또한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있어 가장 극적인 시간과 중첩되어
있습니다. 그는 87년 6월 민주항쟁과 오늘을 이어주는 통로입니다.
이 기념비는 개인에 대한 추모를 넘어 한국의 민주주의를 진일보시켰던 그때의 열망과 헌신, 그리고 희생에 대한 우리들의 기억이자 성찰입니다.

큰 바위 같았으면 좋겠다.
나지막한 언덕 위
특별한 수사나 꾸밈없이
덤덤하게
하지만 듬직하고 힘 있게
그렇게 있어줬으면 좋겠다.
87년, 미주주의를 진일보시켰던 열망과
갑자기 떠나야 했던 아타까움 숨기지도 않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리고 그 모습
온전히 간직한 채
거기 그렇게 있었으면 좋겠다.


1987
1987년, 한국 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을 이룬 ‘87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500여 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독재타도와 직선제 쟁취를 외쳤다. 군사정권의 폭압에 수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결국 시민의 힘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개헌 등 여덟 가지 약속을 받아냈다.

69
6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6·10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 대회’가 열렸다. 다음날 있을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 출정을 준비하는 집회였다. 교문 밖에서 시위를 하던 당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은 사람을 향해 낮게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학우들은 그를 급히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75
7월 5일 이른 새벽, 27일 동안 사경을 헤매던 그는 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산소마스크를 쓴 채 세상을 떠났다. 부검 결과 최루탄 피격이 직접적인 사망 원인으로 밝혀졌다.

79
7월 9일, 시민들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그의 희생을 애도하며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했다. 전국적으로 160여 만 명이 참여한 추모 속에 연세대학교 본관을 출발한 이한열은 신촌 로터리와 서울시청 앞을 거쳐 고향인 광주 망월동 묘역에 묻혔다.

22
그때, 그의 나이 스물 두 살이었다.

작가 이경복

고이한열열사추모비 19880914

이한열 열사가 전두환 독재 권력에 의해 목숨을 빼앗기고 그 이듬해인 1988년, 열사가 외쳤던 민족 민주 민생의 정신을 이어받고 열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연세 동산 한 모서리에 세워져 한열동산을 27년간 묵묵히 지켰습니다. 해마다 6월 9일 추모비 앞에서 추모의 밤을 진행해왔습니다.

여기 통일 염원 43년 6월 9일
본교 정문에서 민주화를 부르짖다 최루탄에 쓰러진 이한열님을 추모하고자 비를 세운다.

작가 김봉준

이한열 피격지점 동판

연세대학교 정문을 바라봤을 때, 오른쪽에서 두 번째 기둥 앞 바닥에는 동판이 하나 있습니다.
1987년 6월 9일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을 기리는 동판입니다. 다음 글과 함께 장미 한송이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가 병원에 있을 때 그의 소생을 빌며 친구가 그려준 장미입니다.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
당시 연세대 2학년이었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곳,
유월민주항쟁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2016년 6월 9일
이한열기념사업회
연세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