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이사를 했다.
첫날밤(初夜). 어감이 이상하지만 그래도 맞는 말이다. 오랜만에 내 방을 갖는다. 차라리 허전한 느낌마저 드는 이유는? 소음이 꽤 요란한 편이다. 차라리 정적보다는 낫다. 다음 주에는 기말고사. 태평으로 시간을 삼켜 먹는다. 회계원리 종강시간도 빼먹어야만 한 당위성은 충분하다. 가치판단일까. 지금부터 시간 배분을 잘해서 부끄럽지 않는(=내 자신에게) 학점을 받아내야겠다. 一精孃이 수고를 많이 했다. 누나와 내가 수고한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공치사할 필요도 없고.
주인집(방)에는 39아베와 35어메, 그리고 국민학교 3학년 지영, 무소속 5살 지은, 두 영양(미래의)이 거처한다. 오빠처럼 잘 따라줄 것 같으니 다행이다. 즐거운 생활이 되었음 한다. 이곳은 영실아파트 2동 404호. 주위에 장미꽃이 만발하여 있고 수양버들이 쾌적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구로구 공단 주위여서인지 사람들이 꽤 바쁘게 사는 것 같다. 개봉역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 문화시설은 거의 없고, 당구장 몇 개와 카페 몇 군데뿐이다. 바로 옆에는 강화·수원간 도로가 있고, 김포공항에서 뜨는 비행기 소리가 요란한 소리로 태평양을 향해 날아가는 지점. 학교까지 교통수단이 될 전철소리마저 요란하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 약간의 시끄러움과 사람들의 재잘거림. 그 속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때로는 자승자박하고 반문하기도 하고, 미치광이처럼 무의식의 의식을 갖기도 한다. 공간이 잠시 바뀌거나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 흐름의 의미를 바꿔놓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 유착동물이 아닌 이상 공간이용은 회피할 수 없고, 사람이 죽지 않는 이상 객관적 시간은 주관적 시간으로 바뀌어 흐르게 마련이다. 좀처럼 특별난 사람도, 좀처럼 뒤떨어진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시대 속에서 평범하기를 고집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그 속에서 비범해지려기 보다는 평범한 속에서 인간의 숭고함을 간직해야 할 것을. 인간은 대개 이러한 것을 슈퍼마켓에서 맛소금과 바꿔먹는다.
이제 곧 이 곳의 공기가 자유스러워지고 내 허파도 잘 소화를 시켜낼 것이고, 이 몸 학생으로서 신분은 당분간 불변이므로 그리 큰 변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글을 끄적거리는 것은 시간의 아쉬움이랄까, 만나고 헤어짐의 아쉬움이랄까, 아무튼 태양이 다시 솟으면 물거품이 될 미천한 감회로 이렇게 또 시간을 흘러 보내고 있는 것이다.
韓.
<86.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