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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용찬 -불의와 싸우고 정의를 사랑하는 정의의 사도가 되리라 양용찬 열사의 가정은 그 동안 살던 고향 남원읍 신례리를 떠나 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비록 가난했지만 화목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주말엔 한라산을 자주 등반했다. 양 열사는 한라산을 오르며 인간을 돌아보곤 했다. 책도 많이 읽으며 또래 친구들보다 남다른 생각을 많이 했다. 열사는 고등학생 시절 일기장에 “불의와 싸우고 정의를 사랑..
백두에서 한라까지 하나 되는 그날, 장애인과 더불어 참자유· 평등· 평화가 이루어지는 그날, 작은 민들레로 태어나고 싶다. -손석용- 착했던 장남 석용이 1991년 뜨거웠던 봄이 지나갔다. 4월 26일 강경대 열사의 타살 이후 5월 한달 동안 11명의 청년, 학생, 노동자가 “민주정부 수립”, “노태우정권 타도”를 외치며 산화해 가셨다. 이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그해 ..
김귀정, “나의 일신만을 위해 호의호식하며 살지만은 않을 것”이라던 이 1966년 8월, 김귀정은 아버지 김복배 님과 어머니 김종분 님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위로는 언니 김귀임과 아래로는 동생 김종수가 있다. 개인사업을 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도전이 번번이 실패하여, 생계는 어머니 몫이 되었다. 노점 행상에 나..
정상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 "아버지 승리의 그날까지 도와주십시오" 생활신조는 '남에게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정상순의 고향은 전남 보성군 초암산 아래에 있다. 아버지는 늘 자녀들에게 "남에게 지탄을 받는 사람이 되지 말라...
불길 속 고교생의 외침 "왜 로보트 교육받아야 하나“ 후송차 타기 전 "통일의 노래를 불러 달라" 30년 전인 1991년 5월 18일. 마지막 행사로 참여한 학생과 교사들이 운동장에 둥그렇게 모여서 학생회가 써 온 '우리의 결의'를 읽는 시간이었다. 그때 학교 건물 동편을 지나 누군가 강렬한 불길을 일으키며 뛰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겁하고 학생들이 물러나며 통로를 내자 어떤 학생이 원 안쪽으로 들어와서 똑..
남긴 것도, 갖고 싶은 것도 하나 없이 정의와 평화를 기도한 이정순 열사 이정순의 영정사진을 그림으로 제작한 것이다. ..
윤용하 - 반쯤 불타버린 유서에 "우리는 끝까지 싸우리라" 1991년 5월 10일 오후 6시 30분경 전남대 대강당 화장실에서 펑 하는 소리가 나더니 온몸에 불이 붙은 청년이 대강당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노태우 정권 타도”와 “노동해방”을 외쳤고 이내 쓰러졌다. 주위에 있던 대학생들이 달려들어 소화기로 불을 ..
“기설아, 왜 죽겠다는 거야?” 슬프게 아프게 살아가는 이 땅의 민중을 위해, 스물여섯 삶을 던진 김기설 불길에 휩싸여 떨어진 스물여섯 살 날이 훤히 밝았다. 동쪽 하늘에는 오월의 태양이 떠올랐다. 아직 학교는 고요했다. 연일 계속된 시위 때문인지 교정에는 최루탄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청년광장을 가로질러 건너편 큰 건물을 향했다. 서강대 본..
박창수 - 영안실 벽에 구멍 뚫은 경찰, 그의 시신을 강탈했다 풍물패 '햇새벽’ 박창수는 부산 문현동 산동네 슬레이트집 단칸방에서 부인, 아들, 딸 네 식구가 살았다. 어려운 삶에도 함께했던 동료들의 아픔을 먼저 생각했고, 노동자들의 진정한 일터 문화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현장 내 풍물패 '햇새벽'의 회원이 되었다. 한진중공업 햇새벽 풍물패는 1989년 최초로 민주노조가 세워지면서 만..
천세용 - "우리는 무엇을 했습니까?" 끝까지 구호 외친 '경원대 횃불' 마지막 순간까지 온몸으로 항거했던 천세용. 그는 스무 번째 생일을 이틀 앞둔 5월 3일 밤 10시 14분, 자신을 키워준 외할머니와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민족사연구회·현대사연구회 동아리 활동... 말보다 실천 천세용 열사가 고교 재학 ..
김영균 - ‘전태일 형’ 부르고 싶었던 영균이... 스무살로 남았다 슬픔도 허락되지 않았던 91년 5월 김영균은 1971년생, 서울 대원고를 다녔다. 그곳에서 교육 민주화를 위한 학생 소모임 '목마름'에서 활동했다. 1990년 안동대학교 민속학과에 입학 후 학생회 산하 '민속문화..
더 바보였던 승희는 먼저 떠났고 덜 바보였던 우린,,, 1991년 4월 26일, 대낮에 대학생이 경찰의 쇠 파이프와 몽둥이에 맞아 숨졌다. 다음날인 27일, 박승희는 한 통의 유서를 남긴다. "슬퍼하며 울고 있지만은 말아라. 그것은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너희는 가슴에 불을 품고 싸워야 하리. (……) 내 서랍에 코스모스 씨가 있으니 2만 학우가 잘 다니는 길에 심어주라. 항상 함께하고 싶다..
"내 아들 살려내라, 노태우를 불러내라" 공권력에 쓰러진 못다핀 청춘 강경대 그날은 4월 26일이었다 1991년 4월 26일 금요일 새벽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1학년생 강경대는 일찍 일어났다. 평소에도 일찍 일어나던 경대는 종이를 꺼내 부모님께 “엄마 아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학교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오겠습니다.”라는 쪽지를 쓰고 집을 나섰다. 그날은 경제학과 야유회가 있는 날이었지만 경대는 야유회를 가..
잠든 민주주의를 흔들어 깨우는 호루라기처럼 1991년 5월 투쟁은 4월 26일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강경대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6월 29일 명동성당의 농성을 끝내기까지 약 두 달간의 민주화 투쟁이다. 이 기간에 13명의 목숨이 희생되었으며 전국에 2,361번의 집회가 열렸다. 강경대,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박창수,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김철수, 정상순, 김귀정, 이진희, 석광수 님이다. 손석용과 양용찬은 그해 8..
https://youtu.be/j6DRM0vSAZ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