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이 흘러가는 곳
그는 송촌에 있는 중학교 국어교사로 발령받자마자 당장 그곳에 한 번 가볼 채비를 했다. 남양주시 조안면에 속한 송촌은 북한강을 눈앞에 둔 작은 마을이었다. 높고도 능선이 완만한 운길산이 마을 뒤편으로 병풍처럼 서 있는 곳이었다. 소나무가 유독 많다는 그곳에선 집들이 산자락에 띄엄띄엄 흩어져 있었다. 마을 어귀, 산언덕 위로 눈에 띄게 번듯한 하얀 이층 건물이 바로 그가 가게 된 중학교였다.
학교를 보러간 날, 그는 아예 거처를 정하고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서울에서 송촌까지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며 가는 길은 멀고도 길었다. 반나절이 넘게 걸려 북한강과 함께 나란히 달리는 큰 길의 버스정거장에 내렸을 때는 마을 뒤편 운길산 위에 머문 겨울 한낮 햇살이 어느새 설핏해지고 있었다. 그는 ‘연세중학교’ 안내표지를 보고 언덕배기로 서둘러 올라갔다.
북한강과 마주 보는 학교는 방학 중이라 그런지 적막했다. 그는 문이 열린 현관으로 들어가 아래 위층으로 다니면서 아무도 없는 것 같은 학교 안을 구경했다. 한 학년에 한 반씩만 있는 학교는 단출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뒷문으로 나가서 본 오래된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산동네도 그저 한적한 것만 같았다.
학교를 둘러보고 언덕길을 내려가는데 넓게 천천히 흘러가는 북한강이 푸른빛으로 다가왔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이 몹시 눈부셨다. 그는 아무 소리 없이 흘러가는 강을 한참 바라보면서, 아직 2월이지만 이미 봄은 저만치 와 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이 강물을 보는 동네에서 펼쳐질 자신의 새 삶이 봄의 서광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바랐다. 큰 길로 나간 그는 북한강 건너편 양수리로 가는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탔다.
양수리에서 그는 낮은 집들 사이로 생뚱맞다 싶게 단 한 동만 우뚝 솟아있는 강변아파트 쪽으로 찾아갔다. 아파트 어귀 단층 상가건물에 공인중개사무소 간판을 붙인 곳이 여럿 보였는데, 그중 한 군데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전기스토브를 몇 개씩 켜놔서 훈훈한 열기가 꽉 찬 넓지 않은 사무실엔 중년의 한 여자가 책상 앞에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그를 보더니 반색했다. 그가 아파트 전세가 있냐고 묻자, 중개사 여자는 금세 사무적인 표정을 지으면서, ‘마침 강변아파트 맨 꼭대기 20층에 25평짜리가 하나 나온 게 있다’고, 이렇게 전망이 기막힌 양수리 강변아파트에서 전세물건이 나온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중개사를 따라 비어있다는 그 집을 보러갔다. 집안은 그럴 수 없이 깨끗했고, 베란다에선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가 훤히 내다보였다. 그는 다른 건 더 이상 살피지도 않은 채 집이 마음에 든다고 말해버렸다.
중개사는 잘 아는 동생이 그 집 주인이라면서, 자기한테 다 맡겨놨기 때문에 바로 그냥 계약하면 된다고, 좀 재촉하는 빛을 보였다. 그는 중개사한테서 집주인의 도장이 찍힌 위임장을 건네받고, 거기 적힌 이름을 보았다. ‘노은금’. 여태 그런 이름을 본 적이 없는 거 같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는데, 중개사가 옆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 별난 이름이죠? 은과 금이 다 들어있으니까요.”
그가 서울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집도 한강변에 있었다. 아파트 25층에서는 키 큰 플라타너스 숲 너머로 반포대교가 내다보였다. 강 옆의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음들만 요란하게 들려올 뿐, 이런저런 시멘트 구조물들로 강물이 잘 보이지 않았다.
겨울방학 전에 그가 서울에서 십년 가까이 다닌 사립학교를 그만 두기로 하고, 경기도교육청 교사모집공고에 유난스레 매달린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애쓴 끝에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의 연세중학교로 배정받게 됐을 때 그는 뭔가 어려운 일을 한바탕 치러낸 것 같았다. 송촌에 가서 학교를 보고, 양수리에 머물 집을 정하고 온 다음날, 그는 어머니 앞에서 좀 망설인 끝에 집을 떠난다는 말을 꺼냈다. 그런데 의외로 어머니가 좋아했다. 시골이든 어디든 그동안 착실히 모은 걸로 집까지 구해 나간다니 대견하다는 것이었다. 5남매 중 막내인 그가 서른여섯이 되도록 결혼할 생각을 안 해 속이 탔는데, 이참에 변화가 생겼으니 좋은 징조라고까지 했다. 그는 여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주름 깊은 얼굴을 좀 서글프게 바라보았다.
그가 학교를 옮기려고 마음먹었던 건 한 여자 때문이었다. 스물다섯 살에 만난 여자였다. 그때, 그 여자 없인 단 한 순간도 못 견딜 것처럼 그렇게 미쳐있었다. 몇 년 동안 사귀면서 여자의 종잡을 수 없는 변덕이 힘겨웠지만, 그게 또 그 여자의 매력이라고 여겼다. 여자는 몹시 살가웠고, 무슨 일에서든 그에게 많이 기댔다. 그는 여자와 결혼할 생각이었다.
그가 사립중학교 국어선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별안간, 여자는 맞선 보게 된 남자와 결혼할 거라면서 아무렇지 않게 이별을 통고해왔다. 그는 충격을 받았다. 오랫동안 거기에 대해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강물처럼 많은 시간이 흘러갔고, 이제는 그 여자가 그의 마음에서 다 지워졌다고 여겼을 때였다. 사방에서 낙엽이 흩날리던 늦은 가을,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던 어느 오후에 닫혔던 기억 속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여자가 그의 학교로 불쑥 찾아왔다. 작년 가을, 바로 몇 달 전 일이었다.
7년 만에 본 여자는 그에게, ‘어쩜, 한 학교에 이리 오래 있냐’며 얼굴이 그대로라는 말을 자꾸 했다. 여자는 많이 변해있었다. 그와 똑같은 서른여섯 살이었지만, 훨씬 나이가 들어보였고, 몹시 신산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여자와 학교 밖으로 나가, 그전에 여자가 좋아했던 분위기의 카페에 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여자는 눈 한 번 깜짝 않고 그를 똑바로 보면서 몇 달 전에 이혼하고 혼자 지내고 있다는 말을 했다.
‘뭘 마시겠냐’고 그가 묻자, 여자는 ‘캬라멜 마끼야또’라고 대답했다. 그가 자신이 마실 아메리카노와 함께 주문해서 가져온 캬라멜 마끼야또를 건네자, 여자는 두 손으로 커피 잔을 감쌀 뿐 마시지는 않았다. 마치 자신의 고단한 삶을 커피 온기에 내맡기는 것같이 보였다.
그는 여자에게 어떻게 이혼했냐고 묻지 않았는데, 여자는 자기가 애를 못 낳아서 의사인 남편한테 이혼을 당했다고 단숨에 말했다. 그는 여자의 말을 들으며 아무 대꾸 없이 뜨거운 커피만 꾸역꾸역 마셨다.
카페 앞에서 헤어질 때, 그는 여자의 눈에 살짝 맺힌 눈물을 보았다. 그 눈물이 그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그는 학교로 돌아와서 교무실 책상 앞에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여자의 이혼은 결혼소식 못지않게 충격적이었다. 어쨌건 그는 여자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 전 여자를 처음 봤을 때 흰 꽃같이 고왔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 거기에 조금 전에 봤던 여자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렇게 찾아 온 여자의 심정을 헤아려 보면서 여자한테서 결코 떠날 수 없는 자신을 생각했다.
여자의 이런저런 사정으로,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여자한테서 전화가 여러 번 왔다. 그는 언제까지든 기다리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어느 날 여자가 밤늦게 전화를 걸어와 흐느끼면서 자기 인생이 왜 이렇게 고달픈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마음과 다르게 여자에게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 후 여자한테선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는 여자가 마포대교 근처 강변 오피스텔에 머물고 있다는 것 말고는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몇 번이나 전화할까 하다 그만뒀다. 그는 여자가 자신에게 먼저 손 내밀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야 새가 훌쩍 날아가듯 다시 자기 곁을 떠나가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는 아예 자리 잡고 여자를 기다리기로 했다. 생각 끝에 양수리 근처로 학교를 옮길 작정을 하게 된 것이다. 송촌에 있는 중학교에 발령받게 되자, 그는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일이 돼가는 것 같아, 행복하기까지 했다.
어느 여름, 그는 여자와 양수리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강변아파트도 없었고, 송촌에서 이어지는 마을버스도 없었다. 강변에는 수양버드나무 숲이 짙푸르렀다. 여자와 함께 사공이 노를 젓는 나룻배를 타고 두물머리까지 가기도 했는데, 배가 강물 한복판으로 나갈 때, 수양버드나무 숲 속에서 샛노란 새 한 쌍이 솟구쳐 오르더니 길게 원을 그리며 눈앞에 있는 작은 산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게 됐다. 사공이 ‘보통 때 잘 보이지 않는 꾀꼬리가 짝을 지어 부용산에 있는 보금자리로 날아갔다’라고 얘기하는 걸 들었다. 그는 뱃전에 기대 부용산 쪽을 바라보았고, 그렇게 강물 한가운데 있는 걸 경이롭게 여기면서 여자의 손을 잡고는 그 순간이 지나는 걸 마냥 아쉬워했다.
그는 양수리에서 여자를 기다릴 채비를 다 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언젠가 여자가 꼭 올 거라고 확신했다.
송촌 앞에서 북한강을 따라 달리는 큰 길은 45번 국도였다. 그는 송촌에 와서야 근처에 새로 생긴 운길산역에서 전철을 타면 서울까지 한 시간 안에 간다는 걸 알았다. 학교 선생들 대부분이 서울에서 전철로 출퇴근했다. 선생들은 그가 서울에서 굳이 학교를 옮겨온 데다 양수리에 거처까지 마련한 걸 좀 별스럽게 보는 것 같았다.
담임을 맡지 않은 그는 퇴근하면 곧장 양수리 아파트로 갔다. 양수리와 송촌의 학교를 오가며 하루에 두 번씩 북한강을 건너다니는 일상이 이어졌다. 그는 자전거를 사서 그전에 중앙선 철로였던 데에 시멘트를 부어 조성된 자전거 길로 다니게 됐는데, 백팩을 멘 넥타이차림 정장에 헬멧을 쓰고 자전거를 달려가며 한동안 어색해했다. 그전까지 자전거를 별로 탄 적이 없던 그는 몸에 착 붙는 운동복차림으로 자전거 길을 질주하는 스피드광들 사이에서 적잖은 곤란을 겪기도 했다.
매일, 변함없는 날들이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그의 자전거 타는 솜씨가 좀 늘었을 뿐이었다. 학교 오갈 때 외에 외출을 잘 하지 않는 그는 날마다 베란다 창으로 두물머리를 내다보는 게 일이었다. 맑은 날씨에는 그 너머, 그전에 팔당호를 만들 때 수몰된 마을 산들이 물 밖에서 작은 섬들을 이룬 곳을 지나쳐, 멀리 퇴촌 강기슭까지 잘 내다보였다.
각각 다른 내력으로 흘러온 북한강과 남한강, 두 물줄기가 합류하는 두물머리는 항상 고요해보였다. 그곳에서 한 물줄기를 이루면서 강물은 서울로 서해로 가는 먼 노정을 시작했다. 한밤중에 잠이 깨면 그는 일어나 앉아 창밖으로 어둠에 묻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두물머리를 망연히 내다보곤 했다. 간혹 그곳에서 두 물이 섞이느라 그런 건지, 포효하는 듯한 요란한 물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올 때가 있었다.
그는 한 물줄기로 흘러가는 강물이 서울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사는 집과, 여자가 있는 곳을 지나갈 것을 생각했다. 곧장 여자에게 달려간다면 강물 따라 흘러가는 배를 타는 게 가장 빠를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간혹, 여자는 대체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는 계속 기다렸지만, 여자한테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3월 말, 푸근한 날씨가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부터 흐리더니 오후 들면서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가득했다. 퇴근길에 자전거를 끌고 나오던 그는 교문 옆으로 늘어선 산수유나무마다 등불을 밝힌 것처럼 무수히 많은 노란 꽃들이 환하게 피어있는 걸 봤다. 진한 꽃향기가 물씬 풍겨 오는 바람에 그는 평소와 다르게 천천히 걸어갔다. 산수유 꽃은 마치 봄의 전령처럼 어느 봄꽃보다도 가장 먼저 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진작 봄은 와 있었던 거지만 혼자 모르고 지낸 것만 같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는가 싶더니 어느 새 순식간에 세찬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큰 길을 건넌 그는 강변 자전거 길로 가지 않고, 비를 피해 그 옆에 있는 ‘강’이라는 음식점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북한강을 등지고 있는 하얀 이층집, ‘강’은 음식점 같지 않았다. 가정집 그대로 아래층만 식당으로 사용해, 일반 식당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학교 선생들과 두어 번 점심회식을 한 집이었다. 그는 비를 맞으며 넓은 마당을 가로질렀다. 억센 빗줄기는 금세 꽃망울을 터뜨릴 것 같은 개나리 울타리에도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현관 아래 자전거를 세우고 묵직한 나무문을 밀자 따뜻하고 쾌적한 기운이 훅 끼쳐왔다. 위생모를 쓴 60대 안주인이 짧은 파마머리를 한 젊은 여자와 창가에 마주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의 물기를 닦았다. 북한강을 향한 통유리 바깥은 빗줄기가 퍼부어져 물 범벅을 이루었고, 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노은금 씨야말로 다시 돌아온 무 같다니까.”
안주인이 젊은 여자에게 뭔가 말했는데, ‘다시 돌아온 무’ 라는 것도 노은금이라는 이름도 참 독특한 느낌으로 들려왔다. 그는 ‘노은금’이란 그 이름을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가까이 가자, 그제야 누가 온 것을 알아 챈 안주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머, 선생님 오셨어요? 비가 갑자기 많이 내려서 어떡해요?.”
안주인은 그를 반기면서, 그가 퇴근길에 비를 피해 어쩔 수 없이 이른 저녁을 먹으러 온 걸 다 안다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가 옆에 있는 빈 식탁에 앉자, 안주인이 물수건과 물병을 얼른 가져왔다. 그 사이에 노은금이란 여자가 일어났다. 안주인이 그와 노은금에게 좁은 동네라 앞으로 자주 마주칠 텐데 서로 인사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선생님, 이쪽은 노은금 씨에요. 이번 봄부터 양수리 유치원에서 통원버스 기사로 일하게 됐어요. 나하곤 전부터 같은 양수문학회 회원으로 알고 지냈죠.”
안주인은 문학회 회원이라는 걸 은근히 자랑하는 것 같은 기색을 보였다. 노은금에게는 그를 가리켜, ‘여기, 연세중학교의 국어선생님이셔.’ 하고 간단히 소개했다. 그는 노은금이 양수리 유치원 버스 기사라는 말에, 최근에 양수리 큰 길에서 25인승 노란버스와 몇 번 마주쳤던 것을 떠올렸다. 저렇게 체구가 작은 여자가 큰 버스를 운전한다는 게 좀 놀라웠다.
노은금이 ‘안녕하세요?’ 하면서, 나갈 채비를 했다. 그도 엉겁결에 반쯤 일어나, ‘김정식입니다.’하고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노은금이 그의 옆으로 지나갈 때, 그는 짧은 파마머리의 앳된 얼굴을 가까이서 보았다. 그 얼굴은 어쩐지 조금 전 학교 교문 옆에서 봤던 노란 산수유 꽃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맑고, 환하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는 통유리 바깥에 여전히 기세 좋게 퍼붓는 빗줄기를 보고, 저 노은금이란 사람은 이 빗속에 어디를 가려는 걸까 생각했다. 그는 노은금이 현관문을 밀고 나가는 것을 쳐다봤다.
안주인이 ‘오늘은 육개장이에요.’하면서 주방으로 갔고, 그는 휴대폰을 들여다봤는데 5시 3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식당 안에 다른 손님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강’은 그날그날 정해진 한 가지 메뉴만 실비로 팔았다. 따로 사람을 두지 않고 남편은 주방에서, 안주인은 홀에서 일했다. 안주인이 펄펄 끓는 육개장 뚝배기와 몇 가지 반찬을 금세 갖고 나왔다. 그때 바깥에서 쿵쿵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마당에서 이층으로 연결된 철재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발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소리는 이내 그쳤고, 그가 귀를 기울였을 때 바깥 통유리에 와 부딪는 빗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그가 뜨거운 육개장을 입으로 후후 불며 먹는데, 안주인이 와서 말을 걸었다. 지금은 모임에 잘 안 나오지만 노은금이 시를 기막히게 잘 써서 그전에 양수문학회에서 이름을 날렸다고 했다. 안주인은 자기는 수필을 쓰고 있다면서 부끄럽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가 빗물이 엉기는 유리에 자주 눈을 주며 별 호응을 않는데도, 안주인은 국어선생님 앞이라 이런 얘기를 하는 거라며 그의 식탁 옆으로 바싹 다가왔다.
“노은금이 좋아하는 어떤 동화가 있어요. 언젠가 양수문학회보에 그 동화에 관해 쓴 적도 있는데, 노은금이 엊그제 유치원에서 아이들한테도 들려줬다고 하네요. 그게 ‘다시 돌아온 무’라는 건데, 선생님, 한번 들어 보실래요?”
그가 뭐라고 대꾸할 새도 없이 안주인은 열심히 외운 걸 잊어버릴까 염려해서 그런 것처럼 단숨에 쏟아놓는 것이었다.
“한겨울 눈도 많이 내린 날, 아기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밖에 나갔다가 무 두 개를 찾아냈지 뭐예요? 집에 와서 한 개는 자기가 먹고, 한 개는 눈 속에 아직 먹이를 구하지 못한 친구에게 주려고 아기 원숭이 집에 갖고 갔는데, 원숭이도 먹이를 찾아 밖으로 나갔는지 집에 없어서, 아기 토끼는 빈 집에 무를 두고 왔어요. 아기 원숭이가 땅콩 몇 알을 구해 집에 돌아왔을 때, 그 무를 봤어요. 아기 원숭이는 자기는 됐다고, 친구인 아기 노루네 집에 무를 갖다 놨어요. 아기 노루도 눈 속에 먹이를 구하러 갔다가 풀 한 포기를 겨우 구해 집에 돌아와서, 그 무를 봤어요. 자기는 됐다고 그걸 친구인 아기 곰한테 갖다 줬지요. 아기 곰도 눈 속에 나가서 고구마 한 개를 구해 왔는데, 집에 돌아와서 문앞에 무가 떡하니 놓인 걸 보게 됐죠. 아기 곰은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에 우선 고구마를 다 먹은 다음, 친구인 아기 토끼가 배고플 것이 염려돼, 무를 들고 아기 토끼네로 달려갔어요. 아기 토끼는 아까 무 한 개를 다 먹었던 탓에 배가 불러 쿨쿨 자고 있었죠. 아기 곰은 그 곁에 무를 살짝 두고 갔다는 거예요.”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귀 기울여 안주인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온 무군요.”
“네, 노은금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얘기라고 좋아하지만, 난 별로예요. 아기 동물들이 착한 건 그렇다 쳐도, 이집 저집 돌고 도는 무에 맘이 쓰여서요. 그리고 노은금이야말로 다시 돌아온 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니까요.”
그가 ‘왜요?’ 하고 물으려는 참에 주방에서 바깥주인이 안주인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이는 내가 손님하고 얘기만 할라치면 저렇게 야단이지.”
안주인은 주방 쪽으로 몸을 돌리다가 그에게 재빨리 말했다.
“노은금이 양수리 강가에 있는 아파트를 전세로 내놓고 다른 데로 갔는데, 한 달 만에 다시 돌아와 지금 우리 집 이층에 방을 얻어 있어요. 양수유치원 원장이 애들 태우는 차를 아무한테나 못 맡긴다고 하도 부탁해서 차량 기사를 하게 됐죠. 노은금은 심성도 좋고, 운전도 아주 잘 해요. 그전에 어디 가서 마을버스를 몬 적도 있대요. 이상하게 양수리를 떠났나보다 하면 금방 다시 돌아와요. ‘다시 돌아온 무’처럼 말이에요.”
바깥주인이 재차 부르자 안주인은 주방으로 급히 가버렸다. 그는 그제야 양수리 부동산에서 봤던 집주인 이름이 노은금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참 별난 이름이죠? 은과 금이 다 들어있으니까요.’, 했던 부동산사무소 중개사의 말도 기억났다.
통유리에 부딪는 빗줄기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육개장이 반 넘게 남았지만 잘 넘어가질 않아 그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육개장 값 오천 원을 지갑에서 꺼내 식탁 위에 두고 밖으로 나갔다.
비는 거짓말처럼 그쳐있었다. 자전거를 끌고 마당을 나가며 개나리 꽃봉오리 울타리가 그렇게 세찬 비를 맞았는데도 끄떡없는 것을 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돌아온 무 같다는 노은금의 방이 있다는, 철재 계단으로 올라가게 돼 있는 이층 쪽을 슬쩍 올려다봤다.
그가 군데군데에 물웅덩이가 진 강변 자전거 길과 차가 빗물을 튀기며 달리는 큰길을 번갈아보며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이는데, 난데없이 노란색 차가 앞에 와서 멈췄다. ‘양수유치원’이라는 로고가 새겨진 25인승 버스였다. ‘강’음식점 옆 공터에서 나온 것 같았다. 그는 운전석에 높다랗게 앉아 있는 노은금을 봤다.
“비가 와서 길이 안 좋죠? 지금 유치원에 들어가는 길인데, 가시는 데까지 태워드릴까요?”
노은금이 환하게 웃음 띤 얼굴로 그에게 그렇게 말을 걸었다. 그는 지체 없이 고맙다고 말하고 자전거를 들고 버스에 올라갔고, 출입문 가까이 자전거를 붙들고 앉았다.
“혹시, 양수리 아파트 20층 5호 주인이세요? 제가 그 집을 얻은 사람입니다.”
“여기 ‘강’ 아주머니가 제 얘기를 했나 보군요.”
노은금은 그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뿐이었다. 노은금은 곧 그 환한 얼굴에 금방 무심한 표정을 지으면서 강물 옆 북한강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해 창밖을 내다봤다. 비 때문에 북한강물이 퍼렇게 부푼 것처럼 보였다. 어느 새 맞은편 운길산 산봉우리 위로 봄날 늦은 오후의 햇살이 엷게 비껴들고 있었다.
노은금은 유치원 버스를 거침없이 능숙하게 운전했다. 빗물에 젖은 길을 종횡무진 달려가는데 차 안이 편안했다. 노은금이란 사람이 운전하는 걸 정말 좋아해서 다시 이곳에 돌아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양수대교를 건너자마자 노은금은 버스 정거장 못 미친 데서 차를 세웠다. 그를 배려해 아파트로 질러가는 내리막 샛길어귀에서 내려주는 거 같았다. 그가 다시 고맙다는 말을 했을 때 노은금이 말없이 웃었다.
노란 버스는 금방 휭 하니 떠났고, 자전거를 끌고 샛길로 들어서던 그는 발을 헛디뎌서 자전거와 함께 빗물에 젖은 시멘트 바닥에 굴렀다.
그날 밤 그는 멍들고 상처 난 두 팔과 무릎에 연고를 바르고 나서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한쪽 다리를 뻗을 때마다 통증이 심하게 일어나 병원에 가야하는 건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였다. 마포에 있는 여자한테서 전화가 온 것은... . 휴대폰이 울리며 액정화면에 여자의 이름이 뜨는데, 어쩐 일인지 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랜만이었지만 뭐라고 인사할 틈도 없이 여자는 다짜고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자신의 고달픈 삶을 한참 하소연해왔다.
그는 스스로도 이상할 지경으로 점점 덤덤한 기분이 돼 갔고, 자기도 모르게 여태 입 밖에 내기 어려웠던 얘기를 쉽게 하게 됐다. 늘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마침내 말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학교까지 옮겼고, 양수리에 집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너무 쉽게 말해 오히려 자신의 진심이 어디론가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여자는 그가 양수리에 와 있다는 데 몹시 놀란 것 같았다. 그렇게 자기를 기다리면서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하더니 갑자기 소리 내 울었다. 짧지 않은 울음 끝에 여자는 조만간 자기 주변이 정리되는 대로 양수리에 한 번 가보겠다는 말을 했다.
‘한 번 가보겠다’라니, 그가 양수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데 감격해 하면서도 어떤 배려라고는 없는 듯한 여자에게, 전에 없던 짜증 같은 게 슬며시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여자에게 그럼 한 번 오라고 기다리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그날 밤 두 팔과 무릎의 상처가 욱신거리고 다리 통증이 제법 심했는데도 깊이 잠들 수 있었다. 창 바깥에서 어둠에 잠긴 두물머리가 어느 때보다 고요히 다가왔다.
다음 날부터 아침마다 비가 많이 내렸다. 자전거를 두고 출근길에 나선 그는 버스 정거장에서 좀체 오질 않는 마을버스를 기다리다, 양수유치원 노란버스가 오는 걸 보고 급한 마음에 손을 들었다. 노은금은 그 앞에 정확하게 차를 세웠다.
그날도 그랬지만, 며칠 동안 마치 장마인 것처럼 비 내리는 날이 죽 이어졌다. 아침나절에는 제법 큰 비가 쏟아졌고, 오후가 되면 그쳤다. 그는 출근 때만 아니라 퇴근 때도 노은금의 차를 타게 됐다. 그가 길에 나가면 양수유치원 버스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앞에 나타났다. 아침에 양수리 큰 길에서도 그랬고, 오후에 학교를 나와 북한강로 버스 정거장으로 갈 때도 그랬다. 그건 노은금의 유치원차 운행시간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버스 출입문 위에 붙은 노은금의 차량운행일정을 자꾸 들여다보다 거의 다 외울 지경으로 됐다.
노은금은 아침 7시에 출근해, 보조교사와 함께 양수리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온 다음 송촌 아이들한테 혼자 운전해 가는 길에서 그를 태워주었다. 송촌에선 그 동네에 사는 또 한 명의 보조교사가 아이들과 함께 차를 탔고, 오후 귀갓길에서도 아이들과 함께 내렸다. 그래서 노은금이 출근길과 퇴근길에서 그를 태울 때는 늘 혼자였다.
노은금은 아침에 송촌을 다녀가면 오전 9시 30분까지 주변의 이런저런 동네를 다니며 아이들을 태워 유치원으로 데려갔고, 오후에는 5시부터 7시까지 아침에 다닌 길을 되짚어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줬다.
그는 노은금이 차량운행을 않는 오전 9시 30분 이후부터 오후 5시까지는 뭘 할까 궁금했다. ‘강’음식점 안주인이 말했던 대로 유치원 아이들한테 ‘다시 돌아온 무’ 같은 동화를 들려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문득, 노은금이 유치원으로 아이들을 태우고 오가며 여덟 번이나 강을 건너다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출퇴근까지 합하면 전부 열 번이었다. 매일 그렇게 강을 건너다니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짐작해보는데, 어쩐 일인지 가슴 한 편이 먹먹해져 왔다.
차를 세워 그를 태워줄 뿐, 노은금은 말이 없었다. 그 또한 매번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유치원 버스를 타고 양수리에서 송촌으로, 송촌에서 양수리로 가는 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았다. 비 오는 며칠 유치원차를 타고 다닌 그는 주말인 금요일 퇴근길에서 노은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음 주부턴 비가 안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월요일부터는 자전거로 출퇴근하려 합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노은금은 웃으면서 ‘고맙긴요’, 했다. 노은금이 운전석 옆 레버를 잡아당기자 출입문이 번쩍 열리면서 길옆에 꽃을 활짝 피운 벚나무의 길게 뻗어 나온 가지를 건드렸다. 그의 머리 위에서 하얀 꽃잎들이 춤추듯 흩날렸다. 그는 좀 미적대며 이렇게 벚꽃세례를 받았으니 따로 꽃구경을 가지 않아도 되겠다고, 그답지 않게 농담을 한 마디 했다. 노은금은 ‘저기 양수리 옆 부용산에 가보세요.’ 하면서, 온 산이 벚꽃에 뒤덮여 굉장하다고 말했다.
어느 새 4월 말이었다. 그는 변함없이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오후였다. 퇴근하면서 평소처럼 강변 자전거 길로 나간 그는 자전거에 올라타기 전, 한 무리의 자전거 스피드 족들이 몰려와 지나쳐 간 뒤편에서, 자전거를 달려오는 노은금과 마주쳤다. 헬멧을 쓰지 않고 짧은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달려오는 노은금은 자전거 위에서 나뭇잎처럼 가벼워 보였다.
유치원 버스를 탔던 이후 그는 노은금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강’음식점에 간 일 또한 없었다. 습관처럼 자전거를 타고 양수리와 송촌 학교를 오갔을 뿐이었다. 노은금의 말대로 부용산에 벚꽃을 보러 가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오래 전 샛노란 꾀꼬리 한 쌍이 원을 그리며 보금자리를 찾아간 부용산에 가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그는 날마다 집안에서 두물머리를 내다보며 하릴없이 지내다 꽃철을 놓쳐버렸다. 그는 처음 양수리에 오면서 작정한 대로 여전히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만간 주변이 정리되는 대로 와보겠다던 여자한테서는 꽃이 피고 다 지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노은금은 자전거에서 내려, 그의 곁을 자전거를 끌고 지나며, ‘안녕하세요?’ 하고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등불을 켜둔 것 같던 노란 산수유 꽃의 환한 빛이 또 한 번 눈앞에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환하게 웃으면서 노은금은 그를 지나쳐, ‘강’ 음식점으로 향한 오르막길로 들어섰다. 그는 노은금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유치원에서 이렇게 일찍 끝나는 날도 있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은금 씨!”
그는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소리쳐 노은금을 불렀다. 그 여자가 돌아보자, 그는 그 앞으로 달려가 ‘강’을 가리키며 ‘같이 저녁이라도 먹을까요?’ 하고 말했다. 노은금은 아무 망설임도 보이지 않으면서, 좋다고 대답했다.
그가 그렇게 노은금을 불러 세웠던 건, 곧 양수리 아파트에 가면 마주칠 어떤 공허함이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고, 지난번에 노은금이 며칠 동안 유치원 차에 태워준 데 대한 고마움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 순간, 그 여자를 부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어떤 절박한 심경이 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게 뭐였는지 정확히 표현해 낼 수 없었다.
그날 저녁 ‘강’에서의 기억은 그에게 온전히 남아있지 않았다. 기억할 수 있는 것만 기억했다. 다음 날 토요일 아침, 그는 ‘강’식당에 딸린 작은 방에서 눈을 떴다. 평소 입에 못 대는 술을 너무 심하게 마셨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는 자신이 거기 바깥주인의 옷을 걸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어찌된 일인지 몰랐다. 머리맡에 있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8시가 다 되고 있었다. 머리가 아프고 갈증이 심하게 일어나는 속에 그는 이부자리를 개고 방 밖으로 나갔다.
창가 식탁에는 전날 풍경이 아우성치듯 남아있었다. 먹다 남긴 생선찌개와 반찬이 말라붙은 그릇들, 빈 맥주병과 소주병들이 널려있었다. 식당 안에 노은금과 나란히 들어갔을 때 안주인이 호들갑을 떨며 반겼던 것과 창밖에서 북한강물에 저녁놀이 어렸던 광경이 떠올랐다. 안주인이 주방을 들락거리며 음식을 내오는 동안 노은금과 주고받은 말들도, 안주인이 밝힌 바람에 앳돼 보인 노은금이 자기보다 두 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는 노은금이 따라주는 술을 다 마시고, 생태찌개 끓인 걸 갖고 와 슬그머니 끼어 앉은 안주인이 연달아 권하는 대로 맥주와 소주를 번갈아 마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전에 없이 마치 하소연하듯 자기 얘기를 하게 된 건, 급하게 취기가 오르고 정신이 흐려질 때쯤 ‘왜 그렇게 늘 슬픈 표정인 거냐’고 노은금이 물어봤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 여자를 오매불망 기다리는데 그 사실을 아는 여자한테서 소식이 없다고 털어놨던 것이다. 노은금은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지금 여기 흘러가는 북한강은 두물머리에서 곧 남한강과 만나게 되죠. 저 반대편에서도 마찬가지로 먼 곳을 휘돌아 온 남한강이 북한강을 만나러 두물머리를 향해 흘러오고 있어요. 두물머리에 닿기 전 지나는 마지막 마을인 강상 쪽에 한 여자가 어떤 남자를 무한정 기다렸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있어요. 여자는 7년 넘게 남자를 기다렸는데, 남자가 오지 않을 거라는 그 사실을 깨닫는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요. 한때 여자는 남자를 잊기 위해 강을 떠나 강원도 깊은 산으로 갔고, 낯선 곳에서 마음을 잡으려고 마을버스를 몰기도 했죠. 그렇지만 소용없었어요. 되돌아와 여전히 습관처럼 남자를 기다리곤 했던 거였는데, 매번 절망한 채 강을 떠났다 다시 돌아오기를 되풀이하면서 결국 남자를 잊었어요. 긴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그동안 어이없는 허상을 봤던 걸 알게 됐죠. 지금 흘러가는 강물은 그 자리에 절대 머물지 않는 매순간 항상 새로운 강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 할까요. 그처럼 지나가는 시간과 사람, 그 무엇에도 매이지 말아야 하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가 식당 안에서 물을 찾아 마실 때, 안주인이 주방 쪽에서 나왔다.
“아휴, 선생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좀 더 쉬시지 않고.”
“저는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안주인은 자기 남편의 옷을 어설프게 걸친 그를 보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제 그 야단 하시더니 옷이 다 젖었지 뭐에요. 제가 말려놓았어요.”
잠시 후 안주인이 그의 옷을 들고 왔다.
“제가 옷에 술을 들이붓기라도 했나요?”
옷을 건네받으며 그가 묻자, 안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술을 붓다니요. 여기 나룻배가 하나 있다니까 선생님이 두물머리까지 가보자고 하도 졸라서 노은금이 바로 이 앞에서 선생님을 배에 태우고 노를 저어 두물머리까지 갔다 온 것 모르세요? 배가 닿기도 전에 내린 바람에 물에 빠져서 선생님 옷이 다 젖었죠. 우리 집 양반이 자다 나와서 옷을 갈아입혀 줬잖아요.”
그는 얼굴을 붉혔다.
“선생님도 참 재미있는 분이세요. 국어 선생님이라 그런지 어제 선생님 입에서 나온 말들이 다 한 편의 시 같았어요.”
그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백팩을 챙겼다. 방에서 나왔을 때 안주인은 그새 안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그는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맑은 날씨에 햇살이 눈부셨고, 처음 와본 곳인 것처럼 바깥 풍경이 낯설었다. 그는 자전거를 끌고 ‘강’마당을 가로지르며 안주인이 한 말을 생각했다. 전날 밤 자신이 노은금이 젓는 나룻배를 타고 두물머리까지 갔다 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대해선 전혀 기억나는 게 없었다. 그리고 그는 노은금과 안주인 앞에서 자신이 무슨 말을 더 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노은금의 방이 있는 이층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마당에서 자전거를 찾아 재빠르게 나갔다.
토요일이어선지 자전거 길은 사람이 많았고 혼잡했다. 헬멧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 채 그는 자전거를 타고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양수리 집으로 달려갔다.
그날 오후, 그는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시 송촌으로 달려왔다. 그는 노은금을 만나고 싶었다. 여러 가지 민망함 같은 걸 무릅쓰고, 한밤중에 두물머리까지 배 타고 갔던 사실을 어떻든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가 ‘강’음식점에 들어갔을 때 자전거를 타고 가다 들른 듯한 손님 둘이 창가에 앉아있었다. 안주인이 그들에게 오늘 메뉴는 오징어 덮밥이라고 말하고 주방으로 가다가 그를 보고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했다. 그가 노은금을 만나러 왔다니까, 안주인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노은금은 어젯밤에 바로 떠났어요.”
안주인은 노은금이 며칠 전 양수유치원을 그만 두었고, 그날로 자기 집 이층에서 이사 나갔다는 얘기를 했다. 양수리를 이미 떠난 줄 알고 있는데, 어제 별안간 그렇게 나타난 거라고, 하지만 노은금은 지금 떠났어도 분명히 또 올 거라고 했다.
“왜냐면, 노은금은 언제나 다시 돌아온 무 같으니까요.”
안주인은 웃으면서 주방으로 급히 가버렸다. 그는 좀 멍해져서 현관문 쪽으로 돌아섰는데, 카운터 위에 공책이 펼쳐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안주인이 자신이 했던 말대로 수필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공책에 적힌 짤막한 글을 읽게 됐다.
‘강물이 흘러가는 곳에 한 여자가 왔고, 마치 그 여자가 부른 것처럼 곧 그 뒤를 이어 한 남자가 왔다.’
연초록 잎사귀가 무성해져 가는 개나리 울타리를 지나 강변 자전거 길로 나간 그는 난간에 기대 푸른빛이 선명한 강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안주인의 공책에서 본 글귀가 맴돌았다. 그리고 강에 물결이 이는 것처럼 노은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긴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그동안 어이없는 허상을 봤던 걸 알게 됐죠.’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어쩐 일인지 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확인하지 않아도 마포에 있는 여자한테서 온 전화라는 걸 알았다. 늘 기다렸던 여자로부터의 전화가 난데없이, 생경스럽게 여겨졌다. ‘통화’를 누른 그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휴대폰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왔다.
“내일이 일요일이고, 모처럼 내가 쉬는 날이라 양수리에 한 번 가볼까 하는데, 어때?”
그가 얼른 대답 않자, 여자가 다시 말했다.
“내가 간다니까 그러네.”
그제야 그는 어떤 불편함을 단숨에 밀어내듯 서슴없이 대답했다.
“나는 너를 기다리지 않아. 오지 않았으면 해.”
자신에게 이런 단호한 면이 있었던가, 스스로 놀라면서 그는 전화를 끊었다. 여자한테서 연거푸 전화가 왔지만 다시는 받지 않았다.
그가 자전거를 달려가기 시작하자, 맞은편에서 스피드 족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다. 그는 그들 사이를 날렵하게 빠져나가며, 이렇게 자전거를 잘 탄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새처럼 가벼운 몸짓을 하면서 재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 옆으로 푸른 강물이 쉴 새 없이 흘러갔고, 강물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산뜻한 기운이 풍겨왔다. 그는 봄이 바야흐로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