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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유고 글

민족분단의 현장에서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3-07-25 00:00:00 조회 : 2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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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분단의 현장에서

 

왠지 슬픈 이야기처럼 느껴져야 했었다는 전방입소. 뒤끝이 개운치 않은 소주처

럼 지금 이 시간에도 일주일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 글을 시작하게 되는 것 같다. 여

기서 무슨 거창한 일투거리를 하자는 것도 아니었는데 별다른 일없이 지나간 것 처

럼 느껴지는 것은, 내 감각이 무디어져서인가? 아니면 소영웅주의적 행동을 바래

사인가?

이틀간의'철책 근무, 사격 연습, 전적지 견학, 별다른 내용 없이 먹고, 걷고, 자

는 일주일이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이 교육에서 구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길래 이렇게 허전하고, 결과한 학과목처

럼, 대출한 강의시간처럼 왠지 슬프게 느껴져야만 하는가?

걸으면서 분단을 생각하고, 먹으면서 짠밥의 무미건조함을 느끼고, 자면서 추위

를 느끼도록 하는 게 이 교육의 목적이란 발인가?

철책 근무 역시 형식적이었고, 현역군인들에게 부담만 주는 일이었다고 생각

된다. 북괴의 대남방송을 듣고 무엇을 더 확신하며, 북한의 철책선을 보고 무슨 긴

장감을 고취시키라고 하는 것인가? 사방에 널려져 있다는 지뢰 사이를 통과하며

고정된 하나의 길, 운명처럼 여기고 목숨이 아깝거든 그저 묵묵히 따르라는 말인

가?

유난스러운 추위 속에서 수고하는 국군장병의 빨간 볼을 본다. 내 나이 또래의

동포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든다. 그네들의 허름한 옷차림. 줄줄 외워대는 몇 줄 될

법한 초소 소개, 여기서는 성깔 죽이고 살아야 한다는 어느 병사의 이야기. 획일적

이고 기계적인 철학 없는 비사고(非思考)지대. 이러한 것들이 분단현실을 고착화시

키는 것들일 것 같다. 또한 북한의 대남방송을 방해하기 위해 실시한다는 방해방송

에서 왠지 낯익은 pop song이 흘러나오는 것은 무언가? 북한이 양키 ·쪽바리가

지배하는 식민지라고 비방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런 의식 없이 병사들이 흥에

겨워 도취될 것 같은 노래라면 아무거나 막무가내로 틀어도 된다는 말인가?

정말 155마일 휴전선이 외세에 의해 세워지고 우리의 군대가 양키의 용병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남방한계선을 지척에 두고 세워진 막사 안에서 동료들이 부르는 야한 노래

EDPS가 이 교육의 목적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왜 이런 자리에서 분단조국에 대한

통일논의 한번 정규시간에 넣지 않고 있는가? 20대 청년의 불타는 가슴으로 뜨겁

게 뜨겁게 느끼기만 하란 말인가? 아무런 정리 없이 또 사회에서 분단현실을 까맣

게 잊어버리고, 왜색문화, 서양문화에 흠뻑 젖어 일상생활 속으로 매몰되어 버리란

말인가?

그렇게 하는 것이 누구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인가? 북한 동포를 진정 하나의 민

족으로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장(場)도 필요 없단 말인가? 그네들이 모두 공산

주의자 빨갱이이기에 멸공만이 남한 동포라도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란 말인가?

철책선을 뒤로 하고 철수하면서도 뒤를 돌며 생각에 잠기는 동료가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서로가 날씨가 너무 추웠다느니, 누가 더 찬바람을 더 많은 시간 맞고 근무했었

다느니, 너희는 무슨 식사했으며 잠은 얼마나 실컷 잘 수 있었냐느니, 우리가 더 조

금 걸었느니 하는 일상적 현상만이 나열하는 연결점 없는 대화들만 난무하며, 누가

더 행진 간에 더 웃기는 노래, 웃기는 이야기하는가를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

인다. 서로의 심정을 토로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는가?

오늘의 대학생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 자신만이 이러한 회의를 느낀다고

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고, 그렇다면 철저한 자기 은폐적, 대화 없는 자기중심적 사고

는 또한 큰 문제 아니겠는가?

사격 연습, 전적지 견학으로 나머지 일주일이 채워진다. 9발의 M16총성, 4시

간 이상의 행군과 진지 탐방, 이 이상이 아님이다.

그리고 금요일 밤, 학우애(哀)행사가 끝나면 당장 서울을 행해 모든 것이 준비된다.

무얼까? 무엇 때문에 어느 학우의 말처럼 짐승처럼 일주일을 보내고 세수 한번

안한 걸 서로 자랑할까? 나도 불알 달린 사나이로 무슨 어려움도 사뿐이 뛰어넘을

수 있다는 자기 과시적 암문화를 만들어내고 한번쯤 군인정신을 고취시켜야 한단 말

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제 불침번 근무시간이 5분 가량 남았다. 학우들의 호흡소리를 들으며 왠지 슬

픈 이야기로만 느껴지는 일주일의 병영생활을 마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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