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정리 (W.1.1--1.4)
元旦.
아침 9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낮잠 자고 책 읽다가 보냈다. 특별히 할 일, 해야 할
일은 없었기 때문에 쉬면서 생각 좀 하고 싶었으나 그저 그렇게 보냈다. 한 살 더 먹
는다는 게 생일 때나 좀 실감 날뿐 그냥 지나가는 하루였을 뿐이다. 2일에는 겨울비
가 계속 내렸다. 오후에 대사, 용이 형이 광주에 내려왔는데 황금동 통나무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망월동에 갔다.
작년 여름에 와 보고 두 번째인데, 그때 참배했던 묘소를 찾아 묵념하고 추모곡을
불렀다. 소주 한 병, 향 하나 사오지 못한 게 섭섭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비가
온 후의 안개가 자욱이 겨울 들판에 엎질러졌으며, 우리의 노랫소리는 처량하게만
들렸다. 그곳에 묻힌 광사의 영혼들이 이제는 아무 손짓도 없이 그저 누워있을 뿐
이라는 무딘 감각이 나의 발걸음을 쉽게 돌려놓고 말았다. '
광주 시내로 돌아와 막걸리를 마시고, 용이 형은 친구와 함께 제주도로 간다기에
광주역까지 배웅해주고 대사와 함께 집에 왔는데, 주로 EDPS하며 보냈다. 식사
후 담배 맛이 아주 은은했다. 같이 있으니 약간 Tension이 들어 잠이 오지 않았고,
습관대로 12시부터 2시까지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3일 아침 늦게 일어나 식사를 하고 같이 전남대에 갔는데 그곳에서 고등학교 1년
선배를 만났다. 철욱이 형은 근 3년 만에 다시 보는 얼굴이라 매우 변해 있었고, 특
히 눈매가 무서웠는데 이유인즉 2급 비밀을 취급하는 송정리 공군방위라는 것이다.
주로 할 이야기는 없었고, 왠지 서먹한 분위기에 담배만 죽여 나갔는데 퍽이나 현실
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형도 고등학교 때는 꽤 낭만적인 인간이었는데 뭐땜시
그랬는지 역시 무서운 게 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나의 낭만적 생활을 청
산하지 못한, 아니 아직 현실을 뼈저리게 고민하지 못하는 내가 밉기만 하다.
오후 1시 반에 전주행 버스에 대사를 태우고 나니 이제 광주에서 더 이상 할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막 저승길 갈 사람처럼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2일에 대사가 쓴 카드가 왔는데 그 정성이 괘씸하게 고마웠다. 3일 저녁에 동생이 공부하는 독서실에 같이 갔는데 1시간 정도 책 읽다 12시까지 잠이 들어버렸다. 동생 보기 민망해서 약간 화를 냈다. 아무 소리 못하게. 집에 들어와서 2시까지 책 읽다 잤다. 습관성 야행독서병인 것 같다.
4일에는 춘당 선생님 뵙기로 한 약속이 5일로 미루어져 그저 TV보다가 오후에
준열이 집에 갔는데, 가보니 G.S를 하고 있었다. 옆에서 연신 담배만 물고 있다가
여명회 일로 약간 좀 많이 솔직히 불만을 이야기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품성이 못 되
먹은 것 같았다. 그저 내가 어쩔 수 없이 직접 참여는 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거 해봐
라 저거 해봐라 해놓고 홀랑 떠나버리려고 한 것 같은데 본의는 그게 아니었더라
도 꽤 애들에게 불쾌했던 것 같다.
사실 아무도 잘난 사람 없다. 서로서로 자기생활 속에서 파묻혀 있다가 수련회나
망년회만 되면 이게 이렇게 되어야 한다느니, 저건 저렇게 했어야 되었다느니 하면
서 허상만을 짚어왔으니 회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지. 아무튼 5일에는 지도교수
님 뵙고 재학생 후배들 만나기로 했으니 잘 끝내고, 준열, 정식, 상현에게 섭섭하
게 않고 서울 올라와야겠다. 소진이 대신 하기로 한 '몰래'를 원래 5일부터 하는 걸
로 알고 있는데 내일 못 올라가니 어렵게 되는 건지. 일이 이리저리 꼬이니 광주에
서도 한대 맞고 서울에서도 한대 맞는 system이 될는지 참 난감하다. 내일까지
중. R사 다 읽고 정리하고 올라가야겠다.
그럼 담배 한대 피고 계속 책 읽기로 하세, 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