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쓰는 편지
존경하는 한열군에게.
이제 장미가 만발하였습니다. 스파르타의 다리를 잘라 침대에 맞추는 잔인한 규격인간을 연상케 하는 종로학원 조그마한 책상에 앉아있는 당신을 생각합니다.
이제 저의 사연이 구구만발 어디에까지 미칠 것인지 제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구절의 소품이라도 당신 마음 깊숙이 자리 잡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입니다.
언어도단이 아닐까요? 이 세상 모든 형용되는 사물이 말입니다. 저는 어느 책에서 책상을 시계라 하고, 시계를 양탄자라 하고, 양탄자를 책상이라 부르며 지내던 한 사람이 결국은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제자신이 인간인지조차 모를 만큼 정신병자가 되어버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사람을 이해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주 먼 미래의 현실을 너무 일찍 성토해 버렸을지도 모르니까요. 요즘의 수식화 되고 제각기 그것이라는 단순한 명명 아래 우리는 스스로가 우리를 너무 얽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탈출의 가능성을 지닌 모든 분들을 저는 존경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바로 그 가능성을 지닌 분들의 하나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 당신은 어쩌면, 불행히도 타의에 의해 생활에 이끌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우리’라는 개념 속에 벌써 타의반 자의반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의반에서 타의반을 생각하느냐 타의반에 이끌려 자의반을 형성하느냐가 모든 행동의 관건이 된다고 저는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인과 속인과의 차이는 정말로 백지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지 한 장에는 세 면이 있습니다. 앞뒤가 두 면이요, 그 사이 두께를 형성하는 가느다란 선이 또 하나입니다. 앞면에서 뒷면으로 돌려지는 순간은 찰라의 시간입니다. 똑같은 원리로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규명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더 이상 추상적 설명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연인끼리 서로 육감적으로 통하는 것과 마찬가질 겁니다. 저는 앞에서 형용되는 모든 것이 언어도단이라고 의문을 제기해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더 이상 언어도단의 실수는 범하지 않겠습니다. 벌써 당신과 저 사이에는 육감이 지배하고 있으니까요. 한없는 명상과 짜여진 하루의 생활이 가상적으로 연을 맺어 당신의 생활이 윤택해지고, 그로 하여 또한 저의 모든 것이 윤택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