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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유고 글

생 명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3-07-25 00:00:00 조회 : 2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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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명

 

한 생명이 태어났다. 고요한 새벽의 여명을 받고 한 생명이 태어났다. 그는 울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보는 세상에 놀란듯한 울음, 그 울음소리가 모든 이에게 울려왔다. 그들은 축복하는 자, 저주하는 자, 빈정거리는 자, 관심 없는 자들로 서로 엉켜 살고 있었다. 어린 한 생명은 또한 그들 속에서 삶을 영위할 것이다.

한 생명, 그것은 이 세상의 어느 곳에서나 어느 때나 와도 좋고 없어져도 상관없는, 한 생명과 어울렸던 생명들이 아닌 다른 생명들에게는 무관심한 존재이다.

한 생명은 무엇인가를 위해 이 세상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는 2,30년의 세월이 걸리며, 또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또 그것의 두 세배의 세월이 필요하다. 한 생명의 사멸에는 어떤 큰뜻이 숨겨져 있다. 한 생명의 사그러짐을 아쉬워 하는 자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그것은 축복해 주어야 하며, 영생을 기원하여야 할 일이다. 한 생명은 자기가 할일을 찾고 그것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이 세상에서 필요없는 존재로서 사그러질 뿐이다.

그중에는 어느 큰일을 잡아 그의 향을 오래도록 피우는 생명이 있다. 몇 십년을 짧게 산 한 생명, 아니 태어나다 죽은 한 생명도 이 세상에 무엇인가를 남기고 간다. 그리고 백년을 해로한 끈질긴 긴 생명도.

태어나다 죽은 한 생명은 생명의 존귀함, 또 그의 주검을 남긴다. 우리 생명들은 태어나다 죽은 생명을 별 생각 없이 생각한다.아니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직 뜨지 않은 두 눈 속에서 그 생명의 존귀함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생명은 우리가 생각지 않았던 무엇인가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을 말하지 않고 간 것뿐이다.

짧은 생명, 그 생명은 짧은 생애 속에 무엇인가 굵은 일을 하였다. 그 할일을 빨리 찾아서 빨리 끝내고 갔다. 서글프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울고 울부짖더라도 가 버린 생명은 결코 다시 이곳을 찾지 않는다. 모든 일을 끝냈기 때문이다. 할일이, 아니 살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오랜 생명, 그것은 자기 할일을 늦게 찾아 늦게 끝내고 가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삶, 삶은 한 생명의 발자취요, 역사이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는 그 생명을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는 유리성에 보호한다. 그 생명은 달린다. 저기 저곳을 향해서.

아 높은 산. 아차 깊은 늪. 아스팔트 깔린 탄탄한 저 길. 뛰었다. 또 뛰었다. 아! 피곤하다. 아! 더 이상 못가겠다. 아니지, 끝까지 참고 나가자. 그렇지, 그렇지, 간다. 또 뛴다. 열심히 뛴 한 생명은 어느 한 지점에 자기의 깊은 심을 내린다. 뒤에 오는 생명들이 보고 느끼고 용기를 얻는다. 모든 생명이 그 어느 생명을 따라가려 한다. 그러면 그 생명은 된, 참된 생명이다. 그 깊은 심을 꽂느냐 못 꽂느냐, 빨리! 늦게! 이것이다. 그것은 시간차이며, 무엇의 차이이다.

한 생명이 쓰러진다. 붉은 노을을 함께 하고 멀리멀리 사라진다. 모든 생명과 이별을 한다. 그 생명은 더 이상 이곳에 오지 않는다. 영원한 이별을 하는 것이다. 노을이 없어지고 벌써 초저녁별이 동쪽 지평선 끝에서 떠오른다.

 

-이한열, 82.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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