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민중은 역사의 주인이다
1. 민중의 역사
전전에 지구상의 민중이었던 제 3세계에 속하는 나라들이 전후, 독립을 하면서 역사의 객체에서 주체로 그 자리를 옮기고 있다. 따라서 전 지구적인 시각에서 볼 때 민중의 나라들이 세계사에 주역이 되어지고 있다는 판단은 그렇게 지나친 과장은 아니다. 왕정 밑에서 단지 신민이었던 민중은 봉건제도 즉 왕정이 공화제로 바뀌고 부족적 봉건질서가 비록 형식적이나마 의회제도의 질서로 탈바꿈하는 역사적 주류에 의하여 역사적 주체가 될 것이다. 민중이 주인이 되려는 그 역사적 흐름의 의지는 강인하게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열강의 제국주의 세력 속에서 나라와 민족의 자립과 자강을 진지하게 생각한 민중이 생겨나고 그것이 비록 체제 안의 수구적 세력과 일제 침략에 의해 무산되었더라도 해방 후 새로운 사회구조와 역사를 엮어야겠다는 민중은 과거에 비해 많아지기 시작하였고 이승만의 권위주의 체제로 인하여 민중이 주인노릇을 못했다 할지라도 민중의 민주주의에의 열망은 4.19의거를 표출되었다. 오늘의 우리의 현실을 볼 때 비록 주인노릇 하기는 어렵다할지라도 국민들의 가슴팍에는 민중의식이 싹트고 있으며 이는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다.
2. 민중의 성격
민중의 개념은 지배엘리트에 의해 억압당하는 상대적인 것이다. 즉 민중은 지배엘리트에 의해 일어난 그들이 국민 위에서 군림할 때만이 일어나는 개념이다. 민중은 경제적 불평등의 시각에서 이해되는 계급과는 달리 정치적 결정수단과 사회문화적 차별수단의 점유여부로 뚜렷이 파악되는 외연적인 것이다. 지배엘리트는 그들끼리의 동질의식을 갖고 군, 산, 관, 정의 복합체를 이루며 무기력하게 방치되어져 있는 민중을 이질적이고 무기력한 대중의 수준에 묶어두려한다. 이는 전체주의 쪽으로 향해나가는 대중사회에서 특히 나타나며, 지배 엘리트에 의하여 조직화 –그들의 의도에서- 되고 동원되고, 조정된다. 민중은 즉자적 민중과 대자적 민중으로 분류된다. 즉자적 민중은 자기의 잠재력과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는 희망과 가능성을 깨닫지 못하는 길들여진 대로 체념 속에서 문제의식 없이 안일하게 행동한다. 설령 문제의식을 갖는다 할지라도 그를 뚫고 나갈 용기가 없으며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한다. 대자적 민중은 잠재력과 저력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며 자신의 권리의 합법적 신장을 위해 투쟁할 수 있는 시민이며 자신의 의견과 이견을 개진할 수 있는 공중(public)이다. 지식인은 <유토피아>의 정열을 가진 대자적 민중이다.
3. 지식인과 민중
지식인과 지식기사로 나눌 수 있다. 지식기사는 사실을 말하되 진실은 중언하지 않는다. 또한 미시적 관찰은 가능하나 거시적 조망은 서툴다. 그의 관찰결과가 특정집단- 기득이권을 가진자-에 어떻게 악용되는지에 관해서는 애써 무관심 하려한다. 그들의 시기야말로 학자적 지위를 갖춘 점잖은 지식인이라고 치켜세운다. 지식기사는 지배집단의 조연이나 중역의 자리로 갈 수 있으나 지식인은 자기가 철저히 민중의 사람이라는 자기가 민중이라는 현실의식을 깊이 통찰한다. 어떠한 상황에 대하여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갖는가의 여부가 큰 차이라 할 수 있다. 지식인은 즉자적 민중을 대자적 민중으로 승화시키는 일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대자적 민중이다. peter berger의 지식인의 태도에 대한 상를 깨뜨려야 하며 그것은 동지적인 공감의 입장에서 겸허하게 알려주는 것이 진정한 의식화 정신이라 할 수 있다.
4. 역사 속의 민중
민중은 역사 속에서 항상 존재한다. 즉자적 민중은 객관적으로 역사 속에서 존재할 때 대자적 민중은 대체로 한 사회가 극도로 부패하여 어두운 역사만을 엮어갈 때 특히 외세의 힘을 빌려 민중을 억압할 때 민중 가운데서 예언자적인 지식인이 나와서 민중을 대자적 존재가 되도록 의식화 시키므로써 생겨났다. 우리나라의 그러한 민중의 발생은 1811년 홍경래의 난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1814년의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민중의 거센 출현과 그 성격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준다. 개화파의 움직임은 대내 자유, 개혁과 대외 자주의 정신을 외치는 것이며 일제 침략이 노골화된 이후에는 민중운동이 민족조의 운동으로 이어졌다. 1919년 3월1일의 민족 자주와 민족 자결의 주체는 대자적 민중이었다. 1920년의 신간회나 근우회의 활동이 있었으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한국의 민중운동은 기백을 상실한 채 자치론 쪽으로 흘렀다. 4.19는 한반도 상황하에서의 대자적 민중의 분노와 봉기의 가능성을 발휘한 당연한 의거였다. 4.19는 권위주의적 반민중적 지배체제에 대한 각성된 민중의거였다.
5. 민중이 주인이 되는 역사
정부는 국가의 대표기관으로써 독점기업의 잠재적, 현재적 횡포를 제어해야 한다. 정부는 국가의 대표기관으로서 반드시 공동선에 대한 강한 집념을 가져야 한다. 민중이 역사와 구조에 주인이 되려면 정치적으로 의회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하며 이는 민중의 수준에 의하여 성패가 결정된다. 지식인은 역사의 반향과 민중의 요구가 자기의 편임을 받으면서 어려운 길을 헤쳐 나가야한다.
Ⅱ. 가치있는 삶과 민중의 아픔
1.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은 어떤 곳으로 뜻을 가지고 전진해 가는 것을 말한다. 현대사회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삶을 점차 에 만든다. 하나는 공간의 출소현상이고 하나는 시간의 단축현상이다. 마지막으로 경쟁의 과열화이다. 시간, 공간적으로 현대화 너무 급변하기 때문에 주체적이고 창조적으로 대응해 내지 못하고 주변인으로 낙오되고 만다. 인구밀도에 비례하여 경쟁의식은 더욱더 살아나며 그에 수단을 가리지 않는 비도덕적 경쟁심리가 싹튼다.
2.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사관이 분명하고 옳아야 비로소 생관이 뚜렷하고 떳떳하게 세워 가장 보람있고 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은 남을 위해 살고 남을 위해 죽음을 뜻한다. 여기에서 남이란 구체적인 우리의 이웃도 아니고 추상적인 세계와 인류도 아닌 바로 부당하게 지배계급에 의해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 사회적 차별을 받는 민중이다. 예수는 로마의 식민지에서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십자가를 졌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온전하게 지녀야 할 인간됨이 깨어질 때 오는 아픔을 같이 아파하면서 깨어지고 비뚤어진 인간됨을 바로 잡아 주었다. 예수는 oo의 해방을 선포하고 실천하며 이러한 뜻있는 삶은 부리는 집단에 의해 조작되는 비방과 고난과 죽음과 맞설 수 밖에 없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주었다. 오늘날 일부 한국 크리츠찬과 교회가 한국의 민중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의 인간적인 삶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3. 민중 전체의 복지를 위한 구조와 역사
지배자가 피지배자의 자발적 동의와 지원을 받는 한에 그들의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도록 지배구조를 버려야 한다. 이러한 타당한 구조와 자랑스런 역사가 이루어 질때는 삶이 구태여 민중을 위하여 투쟁하는 삶이라는 궤할 필요가 없게 된다.
Ⅲ. 지식인, 시인, 민중
1. 산업사회와 지식인
토막지식은 폭증하지만 인간의 종합적 이해력은 감퇴한다. 조직의 합리성은 숭배하는 관료적 지식가만 늘어나고 비판적 이성을 사명으로 여기는 지식인들은 줄어진다. 조직의 합리성은 인간의 이성을 감퇴시킨다.
2. 바람직한 지식인상
지식인은 거시적 통찰을 하며 사실의 세계를 진실의 세계로 착 지식인은 자기 지식이 부당한 기존 질서를 정당화 시켜주는 일과 기존 질서의 유지와 강화에 절대로 필요한 실용적 정보로 기능하는 일을 결연히 거부한다. “과감하게 생각하나 조심스럽게 행동하라” 라는 말을 왜곡하는 지식기사는 그의 행위가 악의 구조와 어두운 역사를 변호하는 일에 게 이름을 깨닫지 못한다.
3. 시인의 사명
새벽을 알리는 자며 어둠의 주역들로부터 고통을 받는다. 그는 짧게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가장 통렬하게 현실 구조를 비판한다. 그리고 가장 큰 파장,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게 글을 쓰는 사람이다.
Ⅳ. 민중에 의한 것과 민중을 위한 것
민주정부와 민주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제일 먼저 국가와 사회가 민중의 것이어야 한다. 민중의 사회, 민중의 국가, 민중의 역사란 민중이 자기들이 뽑은 지도자에 의해 절대로 억압되지 않고 수탈당하지 않고 차별받지 않는 것을 뜻한다. 선거징벌권이 민중에게만 있다. <민중에 의한> 제도적 장치가 <민중을 위한> <민중의> 정치가 가능하다.
Ⅴ. 사회과학, 체제, 민중
사회과학은 구체적 역사조건과 사회 맥락에서 유리되어 생성되고 발전될 수 없다. 폐쇄체제에서 사회과학이 자랄 수 없는 이유는, 사회학자는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강한 신념을 바탕으로 현재의 사회 구조와 기능, 사회적 갈등과 불만 등의 사회변화를 면밀히 분석하고 종합적으로 관찰해야하나 상황의 주역들이 그것을 참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소 학문에서 정열이 학문의 정직성을 지키기 행동을 해야한다. 사회학에서는 <물론성>과 <당연성>에 대하여 일단 회의와 불신을 해보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또한 사회학은 <가치의 상대화>에 흥미를 갖는다. Harvey cox는 세속화된 사고를 현대 도시 기술사회에서 성숙됨의 1 자연이 갖는 마술로부터 해방된 정치의 절대화로부터의 해방된 사고 가치의 상대화를 들었다. 성숙한 사회의식은 사회 구조의 다양성과 개방성을 촉진하는 의식이다. 사회학적 의식은 보편타당한 시각을 존중한다. 개방체제는 자기의 결점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드러냄으로써 자기반성을 할 수 있는 주체성을 지닌 체제이므로 사회학적 의식을 경원하지 않는다. 개방사회만이 사회과학자, 민중이 다함께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조건이다.
Ⅵ. 인간은 구조의 주인이다.
1. 사회와 인간의 만남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는 사회명목론(인간중심주의)과 사회실재론(사회중심주의)으로 논의된다. 양쪽의 장단점은 있지만 특히 지금까지의 사회가 인간의 자율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으며 사회화라는 개념에 인간경시의 풍조가 문제된다.
2. 사회화 개념의 보수성과 성악설
사회화에서는 인간을 기본적으로 악하고 나쁜 존재로 상정하며 기존 질서에 동조시키려는 보수성을 은근히 강요한다. 성악설적 측면에서 따져보면 인간의 자연의 조과성과 위협성을 갈고 다음어서 문화와 문명이 나온다고 말하며 서구인들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정책, 문화건걸의 사명감에서 나온 것으로 합리화했다. 또한 인간 내에 존재하는 자연상태를 통제하여 사회화 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회화의 구조를 인간 위에 고립시키게 하고 기존 구조에 인간을 통로키시게 하는 보수성을 강조하게 된다.
3. 인간은 구조의 수인
인간은 구조의 수인이다. 그러나 그의 준거집단이 현실화 되었을 때는 굳이 수인이라 말할 이유는 없다. 인간은 소속주고를 초월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 특히 청소년에게 있어서는 원천지위를 박차고 미래지위, 종착지위를 갖고자 한다. 청소년을 이해하려면 그의 종착지위를 먼저 이해해야한다. 청소년에게는 현재보다 미래가 더 중요하다. 인간을 타율적 객체로 보고 사회화를 통해 인간형태도 주조할 수 있다는 인간경시의 사상이 만연하고 있다.
4. 인간의 창조성과 자율성
인간은 상황규정이라는 인식론적 입장에서 볼 때 적극적인 주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