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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 |
양용찬 -불의와 싸우고 정의를 사랑하는 정의의 사도가 되리라
양용찬 열사의 가정은 그 동안 살던 고향 남원읍 신례리를 떠나 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비록 가난했지만 화목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주말엔 한라산을 자주 등반했다. 양 열사는 한라산을 오르며 인간을 돌아보곤 했다. 책도 많이 읽으며 또래 친구들보다 남다른 생각을 많이 했다. 열사는 고등학생 시절 일기장에 “불의와 싸우고 정의를 사랑하는 정의의 사도가 되리라”는 글귀를 남겼다. 정의와 불의를 깨달은 고등학생 양용찬은 85학번 대학생이 되며 민주화와 민주헌법 쟁취를 가슴에 새겼다. 양용찬 열사는 고향 친구들에게 대학생들은 민주화와 민주헌법쟁취를 요구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민주화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한라산 등반
실천하지 않는 지성은 휴지통에 버려라 양 열사는 현장의 노동,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민중운동을 고민했다. 최루탄이 교내에 진동할 때 진리가 무너질 때 양용찬 열사는 민중이 배척되는 현실을 목도했다. 열사는 “이 사회 역사의 주역이 되어야 할 이들은 자기들의 낸 세금으로 지내는 사람들에 의해 철저히 배척되고 있는 것이다.” 한탄하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양 열사는 스스로 민중이 되어갔다. “실천하지 않는 지성은 휴지통에 버려라”는 말처럼 양용찬 열사는 진리와 지성이 아니라, 실천하는 민중으로 타일공 노동자로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며 복학하지 않았다. “선배, 난 엘리트가 아닌 민중 속으로 들어가젠 헴수다. 노동 속에서 노동자의 삶을 살젠 헴수다. 난 그게 맞아마씸. 대학에 복학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복학을 거부허쿠다.”
양용찬이 쓴 일기
민중사랑 양용찬 열사는 1989년 서귀포나라사랑청년회에 가입하며 ‘농민사랑’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일용직 노동자였던 열사는 시멘트 가루도 털지 못한 채 매일 청년회 사무실로 나타났다. 동료들의 배고픔을 덜어주기 위해 한손에 풀빵과 찐빵을 들고 있는 청년이 바로 양용찬 열사였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몇 년간 진행되는 동안 양용찬 열사와 동료들은 민중의 삶을 지탱하는 감귤에 대응하기 위해 지역문제 대책위를 구성했다.
“감귤을 살립시다! 제주를 살립시다!” 농민을 위한 조직인 농협에서 오렌지 상품을 판매하자, “우리는 농수산물 수입개방을 결사 반대한다!”며 제민일보(1990.09.03)에 광고를 내며 수입농수축산물 수입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냈다. 양용찬 열사는 일용직 노동자의 몸으로 제주 전역을 돌며, 수입 오렌지 상품 판매 현황을 조사하고, 광고비 모금을 위해 뛰어다녔다. 농수축산물 수입 문제와 감귤 문제 해결에 민중과 함께 고민하고자 했다. 민자당이 제주도개발특별법을 제정하려 하자 제주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민중과 열사의 마음은 제주를 살리기 위해 제주도개발특별법 반대, 저지에 있었다. 제주 민중의 특별법 반대 요구는 영용찬 열사의 산화로 활화산이 되었다. 열사는 유서에서 제주민중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전했다. “국제적인 관광지 하와이 보다 삶의 터전으로 제주를 바란다.”
제주 나라사랑 청년회 회원들과
저자 : 양용찬열사추모사업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