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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 |
김귀정, “나의 일신만을 위해 호의호식하며 살지만은 않을 것”이라던 이
1966년 8월, 김귀정은 아버지 김복배 님과 어머니 김종분 님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위로는 언니 김귀임과 아래로는 동생 김종수가 있다. 개인사업을 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도전이 번번이 실패하여, 생계는 어머니 몫이 되었다. 노점 행상에 나선 어머니가 길 위에서 보낸 시간이 가족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는 해야 할 일은 스스로 하는 법을 일찌감치 터득했다. 밝은 성격으로 친구들과도 잘 지냈다.
심산티
198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불문과에 입학했으나 가정 사정으로 자퇴했다. 낮에는 사무직으로,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부모님을 도왔다. 3년 뒤인 1988년 성균관대학교 불문과에 입학 후, 통일연구동아리인 '심산연구회'에 가입했다. 동기들보다 나이도 두세 살 많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을 벌어야 했기에 모든 행사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소리 없이 주변을 챙겼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동기들에게 그는 먹을 것 잘 챙겨주고, 힘든 일 있으면 의논하고 싶은 언니, 누나였다. 심산연구회 회장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동아리연합회 부회장 선거 출마를 위해 찍은 사진이 불과 반년 뒤 자신의 영정 사진이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당시 학생회 간부가 된다는 것은 수배와 구속 위협을 받는, 자신을 버려야 하는 일이었다. 아쉽게 낙선한 뒤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나의 일신만을 위해 호의호식하며 살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MT사진
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교 1학년 강경대가 죽었다. 등록금 인상 반대투쟁을 벌이다가 구속된 명지대학교 총학생회장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 도중, 대학생이 된 지 두 달이 채 안 된 신입생이 백골단의 집단구타로 사망했다. 노태우 정권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 노동자, 재야인사 등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1991년 5월 25일. 그 전날 김귀정은 심산연구회 방에서 후배들과 밤새 토론을 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집에 간 김귀정은 잠시 눈을 붙였다.
장례식
어머니 김종분 님은 그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밤새 뭘 하고 들어왔는지 오자마자 자빠져 자드라고. 오후 2시에 깨워 달라고 하면서 말이여. 너무 피곤하게 자길래 깨울까말까 하다 깨웠더니 지지배가 부시시 일어나더니 목욕탕에 가서 샤워를 하더라고……. 그러곤 잘 안 입던 치마를 입고 나가더니만, 금세 들어와서 청바지에 티셔츠로 갈아입고 나갔어. 또 데모하러 나가는가 싶었제. 그럴 줄 알았으면 더 자빠져 자게 내버려 두는 건데…….”
그날은 전국적으로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퇴계로에서 5시경 시작된 시위. 수만 명의 시위대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된 수천 명의 전투경찰이 뒤섞인 퇴계로 일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경찰은 시위대를 양쪽에서 압박하면서 진입했고, 꼼짝없이 포위된 시위대는 대한극장 맞은편 좁은 골목길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골목 입구를 막은 채 최루탄과 사과탄을 시위대 머리 위로 터뜨리며 방패와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시위대는 골목길에 주차된 자동차와 짐더미 사이에서 도망가지도 못한 채 하나둘 쓰러져갔다. 전경과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 속에 쓰러진 김귀정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잔인했던 1991년 봄 마지막 희생자, 김귀정의 나이는 스물여섯이었다.
시신 탈취 위협에 맞서 맨주먹으로 그를 지켜낸 이들이 있었다. 공자 사당 앞에는 임금님도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는 유림의 주장에, 빗속에서 무릎을 꿇은 이들이 있었다. 30년째 귀정언니(누이)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힘을 내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 삶 속에서 “나의 일신만을 위해 호의호식하며 살지만은 않을 것”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김귀정의 짧은 삶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