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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 |
정의와 평화를 기도한 이정순 열사
이정순의 영정사진을 그림으로 제작한 것이다.
연세대 정문 맞은편 굴다리 위 철길에서 몸을 던진 여성 1991년 5월 18일, 신군부 정권의 폭력으로 숨진 강경대 열사의 노제 행렬이 연세대 정문을 나서던 순간, 정문 맞은편 굴다리 위 철길에서 짧은 구호 소리가 들렸고, 한 여인이 불이 붙은 채 8m 아래 도로에 떨어졌다. 그녀는 바로 옆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뒀다. 철길 옆 풀밭에 남겨진 체크무늬 여행 가방 속에서 유서와 가톨릭 기도문이 발견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나의 어머니, 이정순이었다. 그 당시 나는 14세 중학교 1학년이었다. 학교 수업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나를 데리러 오신 신부님을 따라 광주 5.18묘역에 묻혀 계신 어머니를 뵈었다. 형편상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지만 때때로 4남매를 찾아오셔서 맛있는 음식을 해주시고, 예쁜 옷도 사서 보내주시고, 자녀들 담임선생님께 편지도 보내셨다. 가까이서 자녀를 챙기지 못한 어머니께서 그 당시 자녀를 위해 하실 수 있는 최선이셨을 것이다. 분신하시기 몇 주 전 목욕탕에서 자녀들의 묵은 때를 밀어주시던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의 감정이 겹치면서 나는 표현할 수 없는 어두운 감정에 억눌린 사춘기와 청년기를 보내야 했다.
어머니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뒷줄 오른쪽이 이정순이고 그 앞이 이 옥자.
독립운동가 아버지, 여순사건 연루자 외할머니 어머니와 형제들은 어릴 적부터 젊은 시절 독립운동을 하셨던 아버지로부터 "나라가 없는 민족은 자식도 없다. 나라 없는 민족은 공부를 해도 남의 종이 되는 공부만 한다. 우리나라는 통일국가가 되어야 외세의 침입을 막을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은 언제나 한편이고, 일본은 절대 우리나라를 포기하지 않는다."라는 밥상머리 교육을 받으셨다고 한다. "나라 일을 하는 분이 우리 집에 오셨을 때 가진 것을 다 주고 멀리 도망가도록 해야 하고, 만약 경찰에 잡혀가 고문을 당하더라도 어차피 말해도 죽고 말 안 해도 죽으니 그냥 모른다고 하고 죽으라."라는 당부를 듣고 자란 어머니는 준비된 여전사였다.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 지인 부탁으로 방 한 칸을 비워줬다가 여순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서에 끌려가 이 4개와 양쪽 갈비뼈가 부러지고 엉덩이가 비틀어지는 모진 고문도 받았다. '달래'란 애칭 남겨준 어머니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께 시 작문하는 법을 배웠다. 외할아버지는 "시는 가슴에 있는 그대로의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 가르치시면서 어린 자녀들에게 시를 지어 와서 낭송하게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 호적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애칭을 부르셨는데, 나의 어릴 적 이름은 '달래'였다. 어머니의 마음을 달래주는 아이라고 해서 '달래'라고 지으셨다고 어머니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분신을 결심하고 어린이날 세 딸과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열사의 거룩한 뜻이 정신이상자로 왜곡 분신하기 며칠 전, 이정순이 불현듯 고향 순천을 찾았다. 그는 동생 옥자에게 강경대 죽음에 항의하며 분신한 뒤 병상에 누워 있던 전남대 박승희를 보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이정순은 동생 옥자에게 너무 많은 젊은이의 희생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박승희의 세례명도 아가다고, 너도 아가다야. 네가 박승희고, 박승희가 너다." 여성이고 학력이 짧다는 이유만으로 열사의 거룩한 뜻이 정신이상자로 폄하되는 현실에 한명숙, 이우정씨가 속한 여성단체에서 열사의 집을 직접 찾아았다. 방에는 책들이 가득 차 있고, 바닥에는 이미 안기부가 방문해서 뒤진 흔적들과 시 초안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순천 죽도봉산에서 공장 친구들과 함께. 뒷줄 맨 오른쪽이 이정순님.
노동하면서 시 쓰기를 놓지 않았던 고귀한 마음 이정순의 세례명은 '카타리나'였다. 맑음으로 정화를 이룬다는 뜻의 이름이었다. 일곱 남매 중 장녀였던 나의 어머니는 순천남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버스 안내양, 가발공장 공원 등으로 일했다. 이혼 후 어머니는 다시 성당에 다니게 되면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노동을 하면서도 시 쓰기를 놓지 않았던 고귀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1991년 당시에는 서울 가락동에서 요리사로 일했는데, 방에 놓여있던 노트 서너 권에는 기도문과 시들이 빼곡했다. 고향의 환대와 장례식 자살한 사람을 위해서는 미사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교회법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쳤으나, 그래도 다행히 함세웅 신부님과 정의구현사제단의 젊은 사제 10여 명이 가락동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집전하여 가시는 분의 넋을 위로해 주셨다. 고향 순천에 도착하니 밤 9시경,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순천대 학생들이 횃불을 들고 마중 나와 있었다. 순천 조곡동 성당까지 2km를 걸어서 학생들이 운구했다. 성당에 도착하니 천여 명이 넘는 신자들이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광주에서 온 5.18 유가족들이 망월동 묘지로 꼭 모셔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장지는 광주로 바뀌었다. 현재 나의 어머니 이정순 님는 2014년 4월 26일에 경기도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 민주묘역에 이장되어 잠들어 계신다.
*이 글을 쓴 공문정 님은 이정순 열사의 큰딸이고, 어머니를 추모하는 일을 하면서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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