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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하 - 반쯤 불타버린 유서에 "우리는 끝까지 싸우리라"
1991년 5월 10일 오후 6시 30분경 전남대 대강당 화장실에서 펑 하는 소리가 나더니 온몸에 불이 붙은 청년이 대강당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노태우 정권 타도”와 “노동해방”을 외쳤고 이내 쓰러졌다. 주위에 있던 대학생들이 달려들어 소화기로 불을 끄고 급히 그를 전남대병원으로 옮겼다. 도착할 당시 청년은 전신에 화상을 입은 참혹한 모습이었다. 청년이 누구인지는 한참 있다 경찰에 의해 밝혀졌다. 밤늦게 그의 가족과 연락이 됐고, 다음날 새벽 아버지와 형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5월 12일 0시 1분, 형이 눈물로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고 말았다. 이름은 윤용하, 스물두 살의 작고 왜소한 청년이었다.
열네 살 때부터 노동을 했던 가난한 농민의 아들 윤용하 열사는 1969년 전남 순천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초등학교를 5학년 때 그만두어야만 했다. 그리고 1983년부터 중국집 배달을 시작했다. 이후 열사는 여러 곳에서 노동일을 하다 1989년부터 '성남피혁'이란 회사에서 노동자 생활을 했다. 이때 대학 출신의 활동가를 만나 사회 현실과 노동자의 참된 삶을 고민하기 시작한 그는 1990년 봄에 '민주직장인청년연합'(아래 민직청) 회원으로 가입했다. 민직청은 직장인을 대상으로 청년운동을 벌여나가던 단체였다. 회원 수는 150여 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된 학생운동 출신들이 많았다. 당시 민직청은 회원이 되려면 정회원 교육을 이수해야 했다. 열사도 정회원 교육을 마치고 문화분과 소속인 풍물패에 가입해 활동을 시작했다.
분신 전날 장미꽃 들고 박승희에게 문병 와 열사의 가슴을 다시 뛰게 만든 것은 강경대 학생의 죽음이었을 것이다. 뒤이어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학생들의 분신과 죽음이 잇따르자 열사는 슬퍼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김기설 열사의 죽음에 대해 분신 배후조종 운운하며 책임을 운동권에게 돌리는 정권에 대해 열사는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심정은 그가 남긴, 반쯤 불타버린 유서에서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현 정부는 김기설 열사의 분신의 책임을 이른바 운동권 세력에게 돌리려 한다. 누가 분신을 배후조종한단 말인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그 누가 버리라고 한단 말인가. 그렇다. 바로 살인을 만행하는 현 정부 노태우,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총칼 휘둘러 온 현 정부뿐이다. 민주화를 외쳐대는 우리 청년학우여, 우리는 그렇게 당했다. 대학생, 노동자, 농민 아니 우리의 4천만 아니 7천만 겨레를 죽였다. 우리는 자본가들에게 끝까지 싸우리라. 노태우는 국민 앞에 사과하고 퇴진하라. 강경대를 살려내라."(윤용하 열사의 유서 중에서) 5월 8일 열사는 대전을 떠나 범국민 규탄대회에 맞춰 광주에 왔다. 5월 9일에는 분신한 박승희가 투병 중인 전남대병원에 문병을 왔지만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배은심 어머니(이한열 열사 어머니)의 기억에 따르면 "저녁에 웬 청년이 승희가 입원해 있는 병실 앞에 장미꽃을 들고 왔다가 면회가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서 있다 돌아갔다."고 한다.
그토록 오고 싶어 하던 망월동에 넋으로 오다 윤용하 열사의 장례는 5월 16일 거행됐다. 장례 주체는 '전국청년단체협의회'(전청대협)과 '광주지역노동자협의회'(광노협)이 맡았고, 장례 명칭은 '민주청년 고 윤용하 열사 민주노동자장'으로 정했다. 청년노동자였던 열사의 짧은 생애가 담긴 명칭이었다. 장례위원장은 오종렬 광주전남대책회의 공동의장이, 집행위원장은 이철우 목사가 맡았다. 5월 16일 오후 1시 30분 발인과 영결식을 마치고 도청 앞 노제를 지내기 위해 전남대병원을 출발한 운구행렬은 지금의 동구청 앞에서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경찰이 다연발 최루탄을 소나기처럼 쏟아내며 도청 앞 노제를 원천 봉쇄했기 때문이다. 결국 장례위원회는 노동청 앞에서 노제를 지낸 후, 열사가 분신한 전남대를 거쳐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열사를 안장했다. 이때가 17일 새벽, 1박 2일의 기나긴 장례였다. 장례식에 참가한 열사의 형이 말한 것처럼 “그토록 오고 싶어 하던 망월동에 끝내 넋으로 오고만” 것이다.
저자 : 안영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