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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설아, 왜 죽겠다는 거야?” 슬프게 아프게 살아가는 이 땅의 민중을 위해, 스물여섯 삶을 던진 김기설
불길에 휩싸여 떨어진 스물여섯 살 날이 훤히 밝았다. 동쪽 하늘에는 오월의 태양이 떠올랐다. 아직 학교는 고요했다. 연일 계속된 시위 때문인지 교정에는 최루탄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청년광장을 가로질러 건너편 큰 건물을 향했다. 서강대 본관이었다. 현관을 지나 계단을 한 발 한 발 올라갔다. 새벽까지 함께 했던 동지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제발 살아서 투쟁하자." "열사들의 한을 우리가 같이 풀어줘야지." 여러 얼굴이 떠올랐다. 성남 민청련의 선배들, 강경대의 죽음 이후 꾸려진 범국민대책위 상황실의 동지들. 그리고 뒤늦게 운동권이 된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님……. 원진레이온의 산재 노동자들과 속초 동우전문대 학생들. 본관 4층 계단을 올라 옥상 입구에 도착했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난간에서 한참을 내려다봤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재킷 안주머니에 있던 유서를 꺼내 다시 읽어봤다. 한 장은 동지들께 그리고 또 한 장은 부모님께 남긴 글이었다. 유서를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통을 꺼냈다. 거기에는 시너가 담겨 있었다. 잠시 후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 민자당은 해체하라!"는 외침과 함께 불길에 휩싸인 그가 지 상으로 떨어졌다. 1991년 5월 8일 오전 8시, 그의 이름은 김기설, 스물여섯의 나이였다.
성남 민청련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은 1965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서 태어났다. 1982년 인천 수도전기통신고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중퇴하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김기설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제대 직후인 1988년 9월 성남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창립대회에서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의 강연을 듣고 나서부터다. 이를 계기로 성남 민청련에 가입하고, 성남노동자의집 상담간사로 1991년 1월부터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으로 활동했다.
"기설이는 내가 1988년 성남 민청련을 창립할 때 자진해서 성남 민청련 회원이 된 후배였습니다. 조직의 막내로 성남 민청련 일을 도왔죠. 특히 나를 잘 따랐습니다. 기설이는 분신하기 1주일 전쯤 우리집에 와서 우리 큰 아이와 한참 놀다가 갔어요. 그리고 자취하면서 생긴 옷가지를 가지고 내 아내에게 세탁을 맡겼죠. 끝내 그 옷가지들은 찾아가지 못했네요." 성남 민청련 의장 시절 김기설 열사와 인연을 맺었던 최경환 전 의원(20대 국회의원)의 기억이다. 최 전 의원과 성남 민청련 회원들은 2021년 5월 9일 이천 민주화기념공원에서 30주기 추도모임을 열었다. 김기설을 알던 사람들은 그를 마음이 여리지만 순수했고, 늘 궂은일이나 드러나지 않는 일을 도맡아 했던 이로 기억한다. 성남에서 사무실을 함께 사용했던 정해랑씨(현재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의 회고다. “기설이는 조용하고 말이 없었어요. 늘 양은 찬합에 도시락을 싸와 점심 때 절반을 먹고, 저녁때 나머지 절반을 먹던 기억이 나네요. 검소하고 부드러움 속에 열정을 지닌 친구였죠.” 김기설은 전민련 사회부장을 맡은 직후인 1991년 3월, 속초 동우전문대 사건-학교 측이 지역의 깡패들과 결탁해 운동권 학생들을 탄압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용갑(1990년 총학생회장)이 의문의 교통사고로 숨지고, 진상을 밝히기 위해 투쟁하던 정연석(1991년 동아리연합회장)이 분신하기도 했다.-이 터지자 속초로 달려와 외롭게 투쟁하던 학생들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당시 동우대 학생이었던 고상만(현재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씨의 기억이다. “기설이 형이 속초에 내려왔을 때, 제가 '아무도 우리에게는 관심이 없다'며 도와달라고 울면서 호소한 적이 있었죠. 형은 제 이야기를 들으며 참 마음 아파했고, 공감해줬죠. 형의 분신 소식을 듣고 그때 형한테 큰 짐을 안겨준 것만 같아 괴로웠어요.”
“단순하게 변혁운동의 도화선이 되고자 함이 아니다.”
열사는 노동자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특히 원진레이온 산재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보상도 못 받고 힘겹게 투병하다 스스로 세상을 등진 소식을 듣고 원진레이온 사태를 알리기 위해 헌신적으로 뛰어다녔다. 이때 노태우 정권의 반민중성과 노동자에 대한 폭압성을 확인하면서 열사는 많이 힘들어 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열사는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고 결심했던 것이다.
단순하게 변혁운동의 도화선이 되고자 함이 아닙니다. 역사의 이정표가 되고자 함은 더욱 더 아닙니다. 아름답고 밝은 현실과는 다르게 슬프게 아프게 살아가는 이 땅의 민중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 속에 얻은 결론이겠지요.(김기설 열사의 유서 중에서)
이런 고민 속에 자신의 삶을 던진 김기설의 죽음은, 공안당국에 의해 유린당했다.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만들어 그의 죽음을 91년투쟁의 정당성을 훼손하기 위해 이용한 것이다. 김기설의 동료였던 강기훈은 그의 유서를 대신 작성했다는 누명을 쓰고 자살방조혐의로 3년의 옥살이를 하고, 24년이 지난 2015년 재심을 통해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사건을 조작한 사람들은 밝혀졌지만, 김기설의 죽음을 이용하고 강기훈의 젊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당사자들은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이 글을 쓴 안영민은 1991년 경북대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했고, 현재 1991년열사투쟁30주년 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과 (사)평화의길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