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10시~17시
02) 325-7216
후원계좌(신한)
100-028-371614
(사)이한열기념
사업회
전시소개 |
더 바보였던 승희는 먼저 떠났고 덜 바보였던 우린,,,
1991년 4월 26일, 대낮에 대학생이 경찰의 쇠 파이프와 몽둥이에 맞아 숨졌다. 다음날인 27일, 박승희는 한 통의 유서를 남긴다. "슬퍼하며 울고 있지만은 말아라. 그것은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너희는 가슴에 불을 품고 싸워야 하리. (……) 내 서랍에 코스모스 씨가 있으니 2만 학우가 잘 다니는 길에 심어주라. 항상 함께하고 싶다." (박승희 열사 유서 중에서) 4월 29일 오후 2시, 박승희는 '강경대 살인 만행 규탄 및 살인정권 폭력정권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2만 학우 결의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남대학교 5∙18 광장으로 나섰다. 집회가 시작되고 약 한 시간 뒤 전남대학교 본부(현재 전남대학교 용봉관) 뒤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자기 몸이 불기둥이 되어 타오르는 박승희는 "노태우 정권 타도하고 미국놈들 몰아내자! 2만 학우 단결하라!"를 외쳤다.
성당에서 레지오 활동 소외계층과 민주화를 위해 기도 박승희는 1972년 4월 2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1남 2녀 중 둘째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절대 뜻을 굽히지 않는 고집쟁이였다. 중학교 때 성당에서 레지오 활동(성당에서 선배 단원과 후배 단원이 2인 1조가 되어 교우나 어려운 지역민 돌봄, 지역봉사 등을 하는 활동)을 하면서 사회 모순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당시 레지오 활동을 기록했던 수첩을 살펴보면 이 땅에서 고통받는 소외계층을 위한 기도는 물론 가정의 평화와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기도 내용이 주를 이룬다. 정명여고에 입학한 후 목포 고교생 YMCA(이하 고교Y) 활동을 하였다. 당시 고교Y는 풍물 강습, 독서토론, 노래 배우기, 시사 토론을 하는 등 목포 지역 고등학생들의 대표적인 사회봉사 실천활동 단체였다. 이때의 활동이 대학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참교육 1세대, 졸업식 날까지 투쟁의 선봉에 서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창립 당시 정부와 학교 측은 전교조 가입 교사에 대한 부당징계를 시도했다. 이에 맞서 목포의 고등학생들은 '목포지역 고등학생 연합(이하 목고련)'과 '자주교육쟁취 고등학생연합(이하 자고연)'을 조직하여 적극 투쟁에 나섰다. 이때 박승희도 함께 활동하였다. 목포 지역 전체에서 40여 명의 교사가 해직되자 학생들은 목고련과 자고연을 중심으로 해직교사 복직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그러나 농성이 장기화되면서 대학입시를 걱정하는 고3들이 대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0개반 실장 중 4명을 제외하곤 모두 학생회 간부직까지 사퇴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박승희는 마지막 졸업식 날까지 투쟁의 선봉에 섰다. 이처럼 전교조 투쟁을 통해 실천적 의식의 성장을 이루었던 전국의 고등학생 세대들을 우리는 '참교육 1세대'라 부른다. 당시를 회고하는 정명여고 친구인 주현씨의 말이다. "더 바보였던 승희는 먼저 떠났고, 조금 덜 바보였던 우린 지금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커피와 콜라 마시지 않고, 삼푸와 린스도 쓰지 않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90년 전남대학교 가정대학 식품영양학과에 입학하였고, 학과 대의원과 '용봉' 교지편집위원회 수습위원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하였다. 외국산인 커피와 콜라를 일절 마시지 않았다. 환경을 오염시킨다 하여 샴푸와 린스 대신 세탁비누와 식초로 머리를 감았다. 그만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작은 애국자였다. 그리고 4월 26일, 이번에는 서울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터졌다. 당시의 심정은 유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싸움이 네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2만 학우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고 하는 함께 하는 싸움이어야 하리. 내 항상 너희와 함께하리니 힘들고 괴롭더라도 나를 생각하며 힘차게 전진하라.” (박승희 열사 유서 중에서)
투병 중에 쓴 “노태우 정권 퇴진, 미국 놈들 몰아내자” 분신 이후 전남대병원으로 옮겨져 온몸에 붕대를 감고 견디기 힘든 화상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치료해준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책을 선물하며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1991년 5월 19일 강경대 열사의 운구가 전투경찰에 막혀 광주 시내로 진입하지 못하고 대립상태가 지속되던 날, 끝내 세상을 떠났다. 박승희의 사망 비보는 삽시간에 남총련 대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1991년 5월 25일, 도청 노제에 참석한 수십만의 광주시민들과 학생들은 애도 속에 '겨레의 딸 자주의 불꽃 고 박승희열사 민주국민장'을 치렀다. 그리고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했다.
저자 : 박승희열사정신계승사업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