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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 살려내라, 노태우를 불러내라" 공권력에 쓰러진 못다핀 청춘 강경대
그날은 4월 26일이었다 1991년 4월 26일 금요일 새벽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1학년생 강경대는 일찍 일어났다. 평소에도 일찍 일어나던 경대는 종이를 꺼내 부모님께 “엄마 아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학교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오겠습니다.”라는 쪽지를 쓰고 집을 나섰다. 그날은 경제학과 야유회가 있는 날이었지만 경대는 야유회를 가지 않았다. 이 말은 당시 경제학과 학생회장 김홍석(경제89)이 연세대 영안실에서 한 말이다. 김홍석은 경대가 야유회에 왔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며 안타까워했다.
명지대 1학년, 학교 담장 앞에서 쓰러지다 이날 오후 3시 40분경부터 명지대 운동장에서 학생 4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당시 학생들의 구호는 "총학생회장 석방하라" "학원자주 완전승리와 노태우 정권 퇴진" "해체 민자당, 퇴진 노태우"였다. 경찰은 쇠파이프와 직격최루탄, 페퍼포그로 중무장한 전경과 백골단을 투입해 강제해산과 체포작전에 나섰다. 백골단을 보자 학생들은 담을 넘어 몸을 급히 피했고, 시위대 선두와 본대를 연결해주는 연락책이었던 경대도 쫓아오는 백골단들을 발견하고 담을 넘어 피하려고 학교 담장에 올라섰다. 이때 백골단 5명이 한꺼번에 달라붙어 경대를 끌어내려 담장 벽에 세워놓고 그중 한 명이 경대를 붙잡고 나머지 네 명은 115센티미터의 쇠파이프와 130센티미터 나무 몽둥이, 진압봉 등으로 경대의 가슴과 어깨를 마구 내리쳤다. 경대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병원으로 옮기던 중 오후 5시 30분경 피워보지도 못한 짧은 19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사인은 외부가격에 의한 심낭 내 출혈이었다. 그날 새벽 부모님께 남긴 짧은 쪽지가 마지막 유언이 된 채 경대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경대정신’의 복원 - 따뜻한 인간애와 참민주 세상에 대한 열망 경대는 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강했고 책을 끼고 살다시피 책읽기를 좋아했고 사회에 대해 호기심이 많은 어린이였다. 경대는 아버지를 통하여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들었고, 고등학교 때는 전교조 선생님을 믿고 따르며 일찍부터 사회문제와 불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내일은 엄마에게 도시락 5개를 싸달라고 했다. 엄마가 왜 도시락이 토요일인데 5개씩이나 필요하냐고 물어보셨는데 나는 그냥 학교에 밥 못 먹는 친구가 있어서 갖다주고 싶어서라고 얼버무렸다. 사실은 내일은 명동성당으로 전교조를 설립하기 위해서 싸우고 계시는 선생님들을 응원하러 간다. 선생님께서 맛있는 도시락을 드시고 조금이라고 힘을 내시겠지. 우리 엄마 음식솜씨는 세계에서 최고니까 말이다. 지금의 노태우 정권도 전두환 군사독재와 다름이 없다. 왜냐면 참교육을 실천하고 학생들의 인성교육과 민주화를 위해서 일하시는 선생님들을 탄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진실한 선생님이 필요하다. 전두환은 광주시민들을 학살했고 노태우는 교육을 대학살하고 있다.” (1989년 5월 24일 금요일 일기) 경대는 옳다고 생각하여 결정한 일에는 몸을 던져 행동했다. 1991년 3월 22일 명지대 총학생회 진군식에 참석하여 시위 도중 학내 진입한 전투경찰의 직격 최루탄에 의해 안면에 큰 부상을 입었다. 눈이 퉁퉁 붓고 여덟 바늘을 꿰매는 수술을 해야 했다. “나는 이전에 최루탄을 맞고 나서 더욱 정권의 부조리를 느꼈고 나처럼 다치는 학우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마음뿐이다. 이 나라는 군인의 나라가 아니다. 또한 우리 선조들은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군사독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주의를 이루어 낼 때까지 행동으로 실천할 것이다.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을 위해 전진하자”(1991년 4월 20일 일기)
강경대 열사와 5월 투쟁의 열사들 - 우리의 거울 강경대 열사와 5월 투쟁의 열사들은 우리의 나태함과 무기력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국가권력의 민주화와 사회권력의 민주화라는 민주화의 큰 과제가 이 열사들이 산화한 이후 과연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민주화가 큰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현실에서, 30년 전의 화염병과 짱돌이 촛불로 바뀌고, ‘폭력’ 시위가 ‘평화’ 시위로 달라졌지만, 그 속에 관통하는 정신과 마음은 3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강경대 열사와 5월 투쟁의 열사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꿈꿨던 세상을 오늘날 우리의 나침반 삼아 다시 더 많은 민주화를 위해 실천하고 전진할 일이다.
*이 글을 쓴 송병헌 박사(서강대 정치학)는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냈고, 현재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자문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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