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변호사 김승교 (1968~2015)
국가보안법과의 투쟁
김승교 변호사는 1968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6년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1980년 광주에서 시민을 짓밟은 전두환이 대통령이던 시절이었다.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운동을 하는 대학생 중에는 노동현장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공장뿐 아니라 농촌, 학교, 정치권, 일반 직장으로 사회적 진출이 다양해졌다. 김승교 님도 전공을 살려 법조인으로 역할을 하고자 했다. 1996년 사법고시에 합격하였다.
유능한 변호사였다. 2001년 뉴욕 국제전범재판과 2002년 광주 5.18 시민 법정에서 시민검사를 맡았다. 피의자에게 수갑과 포승줄로 꽁꽁 묶어놓고 장시간에 걸친 조사를 하는 관행에 대해 2001년 헌법소원을 냈고 결국 2005년 승소하였다.변호사가 되자마자 이적 단체로 매도당하던 한국대학생총연합회(약칭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을 변호하였다. 이후 국가보안법 사건을 도맡다시피 했다. 대부분 무료변론이었을 뿐 아니라 사재를 털어 학생을 도울 때도 있었다. 변호뿐 아니라 인권 측면에서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억압적인지도 살펴보았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국가인권위원회 국가보안법 TFT 위원을 역임했다. ‘유엔인권이사회의 한총련 이적판결에 대한 국제인권규약 위반 결정’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러던 김승교 변호사 자신이 국가보안법의 올무에 걸렸다. 6.15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이하 약칭 실천연대) 상임공동대표 역할을 하던 때였다. 6.15남북공동선언이란 2000년 6월 15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발표한 선언이다. 이 선언에서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선언하고 남북의 통일 방안에 공통성이 있음을 인정하며 경제협력을 비롯한 교류 활성화에 합의했다.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낸 정상회담은 1948년 분단 이후 남북의 대표가 만난 첫 번째 회담이었다.
6.15남북공동선언을 실천하기 위해 2000년에 만들어진 단체가 실천연대였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2008년 실천연대는 반국가단체(북한)에 대한 '찬양 고무' 혐의로 기소되고, 2010년 7월 대법원에 의해 불법 이적 단체로 판결 받았다. 수없이 그가 변론했던, 실체도 규명하기 어려운 ‘찬양, 고무’에 의해 그 역시 6년 동안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었다.실천연대가 이적 단체로 판결을 받은 다음달,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약칭 민권연대)를 만들고 공동의장을 맡았다. 그가 마지막까지 활동했던 터전이다. 그는 국보법 변호사와 함께 (민권연대)의장님으로 불렸다.
진보정당을 향한 헌신
지금이야 정의당, 진보당, 녹색당 등 다양한 진보정당이 있지만, 진보정당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 하던 때도 있었다. 대한민국에 처음 진보정당이 등장한 것이 2000년 민주노동당이었다.
김승교 변호사는 민주노동당 중앙당기(黨紀)위원장, 중앙위원, 정책위원 등을 맡았다. 200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으로 출마하면 당선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지만, 선거를 통해 민주노동당을 알리고 민주노동당의 정책을 설명하기 위해 출마했다. 출마와 낙선 이후의 빚을 감당하는 것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었다. 민주노동당에서 일부가 나가 진보신당을 창당했다가 그중 일부와 다시 합쳐 2011년 통합진보당이 창당되었다. 통합진보당에서 김승교 변호사는 최고위원, 당원교육위원장, 비상대책위원, 통합진보당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았다. 2012년 대통령 선거 후보자 TV토론회에서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는 박근혜 후보에게 다카키마사오가 누군지 아냐고 물었다. 다카키마사오는 박근혜 후보의 아버지 박정희가 창씨개명한 이름이었다.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13년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구속을 시작으로 박근혜 정부는 통합진보당에 대해 정당해산신청을 청구한다.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 선고에서 통합진보당해산심판사건은 8대 1로 인용되었다. 헌법재판소는 소속 국회의원 5명의 의원직도 상실되었다. 이어 2015년 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석기 전 의원에 대해 '내란선동'으로 징역 9년 원심을 확정했다.
2014년 말 김승교 변호사는 암 판정을 받는다. 실천연대 사건으로 국가보안법에 의해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어 있었고, 몸 담았던 통합진보당은 해산되었으며, 자신은 병마에 사위어갔다. 2015년 8월 31일 김승교 변호사는 숨을 거둔다. 2017년 8월 그의 2주기 추모제에서 민권연대와 여러 단체들이 연합하여 국민주권연대(약칭 주권연대)를 창립하고 그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잊으라 했으나 잊을 수 없는 사람
김승교 변호사는 병석에서도 남을 이들을 염려하는 사람이었다. 동지들과 함께해서 행복했고 고마웠다며 낙오한 자신을 잊으라고 한다. 그러나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그를 잊을 수 없다.
사람들은 그가 변호사니까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자신은 월세 집에 살면서도 동지들과 만날 때 밥값 술값은 자신의 몫으로 여겼고, 민권연대에서 사업을 벌이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내세울 줄 몰랐다. 자신을 ‘바지대표’라고 낮춰 부르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면 언제라도 자신을 내놓는 사람이었다.
김승교 변호사는 진보운동에서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목표가 함께하는 사람, 동지라고 생각했다. 토론으로 동지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였으며 한번 결정된 조직의 방침은 힘써 따르는 사람이었다. 동지애는 진보운동의 승리를 위한 가장 위력한 무기라고 생각한 사람이었으니 마땅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자신을 낮추어 모두를 높이는 이!’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동지들에게 그는 이렇게 기억될 것이다.
-관장 이경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