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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운동가 정유미 (1962~2008)
1962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난 정유미는 14세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사춘기에 이민을 갔기에 한국과 미국의 언어와 문화를 충분히 잘 아는 흔히 말하는 1.5세대였다. 정유미는 일리노이 주립대에서 회계학을 전공하며 시카고지역의 한인청년 조직인 ‘석암’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어릴 적 떠난 한국을 쉽게 잊을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고등학생 때때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고국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된 것이었다. 광주민주화 운동의 수배자로서 미국으로 망명한 윤한봉의 주도하에 설립된 “미주한국청년 연합 (한청련)”에 참여하면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미주 한인동포들의 권익을 위해서 1980, 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까지 꾸준히 활동했다.
정유미는 한청련이 해체된 후, 1994년경 설립된 ‘통일 조국과 동포사회를 위한 시카고 모임’을 주도했다. 이제 그의 관심사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넘어 한반도 통일문제로 넓어졌다. 당시 미주한인사회에서 한반도 통일문제는 민감한 이슈였다. 대부분 70-80년대 반공 반북 정서가 강할 때 한국을 떠난 이민자들이 주류인 교포사회에서 통일운동은 친북성향으로 오해받기 쉬었기 때문이다. 정유미는 활동을 통해서,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해소하고 한민족의 동질감을 회복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기획했다. 예를 들어, 2000년경에는 북한의 예술가들을 미국으로 초청하여 뉴욕, 시카고 등지에서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미국에 사는 소수자로서 한인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민족의 인권과 권익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시카고의 흑인 인권단체인 리쿠르마 워싱턴과의 교류를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고 했으며, 이민자들의 권리 찾기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94년 미국의 공화당이 주도한 반이민법(chapter 187)의 저지를 위해 한인단체의 이름으로 연대하면서 당시 미국 내의 연대 운동에 소극적이었던 한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이는, 그녀가 한국과 미국의 언어와 문화를 다 이해하는 1.5세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유미는 서로 다른 이들을 이어주는 '다리'였다.
2000년 미군의 양민학살 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전민특위)가 결성되자 정유미는 공동사무국의 부총장, 이후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외국의 평화운동 단체와 인사들을 모아 국제공동조사단을 조직하고 8회에 걸쳐 서울과 노근리 등 지방의 여러 도시를 방문해 학살 현장 조사를 벌였다. 이어 북측의 평양과 신천 등 여러 도시를 방문해 미군 학살 실태 조사를 했다. 재미교포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은 활동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성과를 모아 2001년 매향리 사격장문제,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등을 고발하고 밝히기 위해 국제공동조사단과 함께 미국전범재판(뉴욕)을 여는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며 한국 언론과 국제사회의 주목을 이끌어내는 결실을 맺었다.
정유미의 땀과 노력으로 매향리 문제는 한국사회 여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노근리 학살은 역사상 처음으로 한미양국의 합동조사가 이루어졌다. 2003년에는 한국전쟁 당시 경남지역에서 벌어진 미군의 양민학살 문제를 전 세계에 전하기 위해서 스위스에 있는 유엔본부에 독일, 미국, 한국 등에서 참석한 동포 청년, 활동가들과 함께 방문하여 유엔 인권위에서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알렸다. 또한 한반도 평화원정대의 브뤼셀 원정투정,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저지 워싱턴 원정집회’ 등 한국진보진영의 국제원정투쟁의 실무를 도맡아 진행했다.
개인적인 후원회가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국제연대 사업을 진행하는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정유미는 미국 회계 법인에서 회계사로 일하면서 번 모든 수익을 이 활동에 썼다. 이후 국제적인 통일운동을 위해 뉴욕으로 이사해 활동을 이어나갔다. 1999년 8·15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을 앞두고 지난 몇 년 동안 답습되었던 통일운동 분열을 극복하자는 바램으로 범민련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의 공동방북을 시도하였다. 이때 정유미는 서울과 북경, 평양을 오고 가면서 공동방북의 성사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 그 결과 여섯 명의 통일방북단이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해 8·15 통일대회는 단결된 행사로 치를 수 있었으며 실로 남과 북, 해외 동포 모두의 바램이었던 통일운동의 분열이 극복되는 순간이었다. 화해자 정유미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던 일이며 이는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의 밑거름이 되었다.
정유미는 살아 있는 동안 남북을 잇는 오작교의 역할을 넘치도록 했다. 또 미국의 전쟁범죄를 전 세계에 고발하는 주역으로 크게 활약을 하느라 자신의 몸과 마음을 보살피지 못했다. 피로와 스트레스가 겹치면서 몸이 상했고, 급기야 2006년 위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 그의 마지막을 미국인 남편 자니 클라인이 지켜주었다. 넓은 포용력과 추진력으로 늘 밝은 에너지를 품었던 정유미, 평화운동가, 통일운동가, 청년운동가로 청춘을 바친 정유미는 2년여의 암 투병 끝에 46세의 나이에 고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성지인 마석 모란공원에 묻혔으며, 지인들은 매년 기일에 그곳에 모여 화해자 정유미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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