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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 |
임미영 양심수후원회 사무국장 (1956 ~ 2014)
부산에서 태어난 임미영 사무국장은 (사)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이하 양심수후원회)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4년 6개월여의 후원회 일은 그를 평범한 주부에서 사회 변혁의 중심에 서게 했다. 작고 가냘픈 몸에도 면회 시 교도소 측에 항의할 일이 생기면 쓰레기통을 엎어버리는 강단과 양심수를 위한 전국 투어에 빠짐없이 참여하고자 했던 열성을 지닌 그였다. 양심수후원회는 자주·민주·통일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양심수(청년, 학생, 교사, 노동자, 가정주부, 석방 양심수 등 각계각층)의 석방 운동과 체계적인 후원을 목적으로 1989년에 창립한 대중적 후원 단체이다. 1989년부터 10년 만에 260여 장기구금 양심수를 석방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2000년 비전향 장기수 1차 송환 이후 2차 송환추진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1989년 낙성대에 '만남의 집'을 마련해서 무연고 출소자에 대한 안정적 생활공간과 생활지원금을 지원하고 있다. 양심수후원회 사무실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장기수 선생님들에 대해서는 그전에도 알고는 있었죠. 저는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을 경험하진 않았고 그냥 평범한 시민이었어요. 후원회에 들어와서 공부하면서 장기수 선생님들에 대해 더 알게 되었죠. 박정희 독재 시대에 20대 청소년 시기를 거친 세대들이라 자연스레 이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외부활동을 못 했지만, 심정적으로는 꾸준히 응원했었죠. 우리 세대들이 좀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남과 북의 통일문제만 해도 관심이 많지만 그걸 어떻게 표출하진 못하고 마음속에 쌓아놓는 경우들이 많아요." (2010년 <민중의 소리> 인터뷰 중에서) 평소 책 읽기와 영화 보기,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던 감성적인 그녀가 운동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92년 ‘열린 사회 아카데미’(수요반)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뒤늦은 공부와 운동에 대한 열정은 그녀를 양심수후원회로 이끌었다. 20대의 아들을 둔 평범한 가정주부가 감옥과 시위 현장을 제집 드나들듯 하는 활동가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파스텔톤 통일운동가-
양심수후원회에서 2년 정도 함께 근무했던 모성용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부의장은 “미영이 누나는 장기수 선생님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눈물짓는 눈물 많은 누나였어요. 면회 가면 항의 투쟁에 앞장섰던 자칭 사회주의자이자 들꽃을 머리부터 신발까지 꽂았던 파스텔 색조 같은 분이었지요.”라고 그를 떠올린다. 자신의 색을 굳이 드러내지 않지만, 은은한 존재감으로 자신의 길을 걸었던 임미영 사무국장이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병마와의 투쟁 중 1년 정도 집에서 휴대용 산소호흡기를 사용했는데 “어디든지 다 갈 수 있다.”라며 천진난만하게 긴 줄 달린 산소호흡기를 자랑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2011년 양심수후원회 사무국장에서 삼성일반노조 사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가 양심수후원회에서 삼성일반노조로 가게 된 것은 감옥이 맺어준 인연에 기인한다. 당시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이 양심수로 영등포교도소에 복역하고 있었고, 교도소 면회가 인연이 되어 삼성일반노조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된다. 매주 수요일 삼성본관 앞 삼성규탄 집회 · 1인 시위 · 전국 삼성 계열사들 노동자들과 만나는 전국 순회 투쟁을 진행하면서 몸이 허약했던 그는 건강이 악화된다. 다음은 2011년 9월 2일 삼성본관 규탄 집회 투쟁 현장에서 그가 남긴 글이다.
억울하게 죽어갔어도 더 이상 허공에 떠돌지 않도록 이름 불러 투쟁의 결의로 우리 품으로 안아주는 시간이었다. 저항의 시간이었다. 연대의 시간이었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시간이었다. 명망가들이 아니라 현장 노동자들이 온몸으로 분노를 담아낸 시간이었다. 동지들이 있었기에 과즙 풍성한 과일처럼 달콤한 시간이었다.
-우리 품으로 안아주는 시간-
“일하면서 느끼는 보람이요? 그보단 선생님들 만나는 게 큰 힘이 돼요. 늘 동지라 불러주시고 통일운동에 전념하게 도와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부족한 점은 다 품어주는 데 정말 큰 힘이 되어 주시죠. 그렇지 않았다면 제 인생에 큰 좌표를 갖진 못했을 거예요.”(2010년 <민중의 소리> 인터뷰 중에서) 비전향 장기수 어르신들, 양심수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그는 예순 직전인 2014년 6월 28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 설명〉 1. 낙성대 ‘만남의 집’ 앞마당 목단화 앞에서 활짝 웃는 모습 (2010) 2. 삼성일반노조 사무국장 시절 기흥 삼성 반도체 공장 정문 앞에서 1인 시위하는 모습(2011 ~ 2012) 3. 구속노동자 후원회 사무실에서 집회 전 모습 (2010) 4.장기수 문상봉 님이 계신 청운 요양원에서. 왼쪽부터 이민숙, 임미영, 문상봉, 모성용, 박희성 (2012) 5. 후원회 소식지 177호 (2006. 7. 11.)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양심수와 양심수 가족들을 만나면서 소식지에 글을 실었다.
-학예사 강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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