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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 |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1933~2004)
“내가 여기서 태어났어도 북도 다 같은 내 조국이지. 지금도 북에 가는 꿈꿔요. 꿈에 본 남편도 늙었더라. 살아 있으면 얼마나 좋겄나. 나 죽기 전에 북에 가서 감옥이랑, 낙성대에서 함께 살았던 동무들 꼭 다시 만나고 싶어."
지리산에 '입산'한 남편을 찾아갔던 열일곱 새색시 정순덕. 그 길로 빨치산이 되어 13년간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에서의 유격대 활동으로 '여전사'로 불렸던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은 1933년 경남 산청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의 뜻은 ‘덕에 순응하면서 세상을 살라’였다. 17살이 되던 1950년 5월 초 결혼하게 되지만 한 달 후 전쟁이 나고 마을 일대가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자 남편은 이른바 ‘부역행위’를 하게 된다. 하지만 북한군이 철수하자 남편은 부역한 사실이 두려워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몇 달 남짓 남편과 함께 했던 신혼생활의 행복도 잠시, 남편이 떠나자 국군과 경찰이 집으로 쳐들어와 남편을 찾아내라 협박한다. 시동생 세 명을 돌보던 정순덕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지자 엄청난 두려움에 떨게 되고 결국 그해 12월, 남편의 겨울 웃을 챙겨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그녀가 남편과 지리산에서 지낸 날짜는 겨우 20여일. 두 달 만에 남편과 재회하게 되지만 머지않아 이별하게 된다. 남편을 잃은 정순덕은 13년이란 세월 동안 지리산을 누빈다. 누군가는 '짐승처럼 누볐다'라고 표현했다.
”나도 내가 빨치산이 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후 정순덕은 부대에 편입되어 전투를 배우긴 했으나 한동안 그의 주 업무는 밥하고 빨래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후에는 망실한 빨치산이 되어 마지막까지 버텼지만 1963년 11월 12일, 두 사람은 죽고 그녀만 생포되었다. 경찰과의 총격 중 다리에 총상을 입고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정순덕은 1985년 8·15 특사로 가석방될 때까지 23년 동안 대구, 공주, 대전교도소 등에서 갇혀 살았다. 가석방 후 음성 꽃동네에서 생활하다가 1988년 자립을 위해 꽃동네에서 나와 부산 가죽공장, 서울 가구공장, 구로동 양복걸이 공장 등지에서 노동하며 살아갔다. 교도소에서 징역 다 살도록 두어번 면회를 온 어머니와 여동생 외엔 아무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의 발길마저 끊긴 뒤, 그는 사고무친의 고아가 되었다.
“섭섭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내 땜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는데. 가족들을 다 데려다 때려서 아버지는 골병들어 돌아가시고, 형제간은 학교에서 손가락질받아 교육도 마치지를 못했소. 그 시절이 그리 험한 시절이었소. 들판에 사람이 죽어 넘어져 있어도 시체 수습도 못했지. 시체 치우면 죽이니까. 자기 때문에 가족들 죽는다고 자살한 사람들도 많았어요. 산에 올라가 죽은 백성도 많았고. 부역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지금 사람들은 몰라요.”
1995년 비전향 장기수들의 삶터인 서울 봉천동 낙성대 '만남의 집'에 정착해 생활에 안정을 얻었지만 1999년 3월 20일 점심식사를 준비하던 중 뇌출혈로 쓰러졌다. 보라매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한 달 만에 깨어나 인천 나사렛 한방병원에서 치료 받았다.
2000년 비전향장기수로써 송환요구가 있었으나 당국의 거부로 무산되었고 2001년 전향무효를 선언하며 2차로 송환을 촉구했지만 이뤄지지 못했다. 2004년 재차 마비가 와 그해 4월 1일, 향년 70세로 별세하였다.
"통일사업 열심히 하라고 해. 지금 우리 민족에게는 딴 말이 필요 없어. 통일하는 일이 제일 큰 과제야. 전문가들만 나서서 통일사업 하는 거 아니거든. 모두 나서서 통일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해주기를 바랄 뿐이지. 죽지말구 살아 있어라고 해. 곧 통일될 테니까. 그때 만나자고 해. 그러기 위해서는 통일사업도 열심히 해야 하고 말이야."
-2차 송환을 기대하며 기자에게 했던 말. 2000년-
여성 빨치산 정순덕은 2004년 세상과 이별하기까지 2차 송환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희망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2000년 비전향 장기수 1차 송환 대상으로 분류됐으나 송환 미신청 등을 이유로 북측으로 가지 못한 이들은 정순덕을 비롯한 33명이다. 이들은 2001년 2월 6일 기자회견을 열어 송환을 요구했고, 당시 정부도 송환 방침을 정했으나 이후 일부 정치권에서 거세게 반대해 송환이 미뤄졌다. 그간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송환 희망자 33명 중 19명이 노환이나 옥고 후유증 등으로 세상을 떴다. 그 중 정순덕이 있었다.
권낙기 통일광장 공동대표는 정순덕에 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97년 북한이 물난리로 고통을 겪을 때 쌀을 보내기 위해 장기수 선생들과 시민단체를 상대로 모금운동을 했다. 그때 선생께 낡은 장롱 안의 옷가지에서 후원회와 독지가들이 보내 줘 모은 돈이라며 110만원을 내놨다. 도저히 받을 수가 없어 20만원만 달라고 했는데 선생께서는 깊은 한숨을 쉬며 ‘미 제국주의를 몰아내기 위해 총을 들고 산을 뛰어다닐 때는 목숨도 아깝지 않았다. 북의 형제들이 고난을 겪는 지금 조국과 민족 앞에 내놓는 마지막 돈’이라고 해 콧등이 시큰거렸다. 선생이 뿌린 씨앗이 종자가 돼 조국 통일이 힘차게 일어날 것이다.”
지리산 빨치산 생활 13년, 감옥 생활 23년. 열일곱 나이로 남편을 찾아 지리산에 입산한 정순덕씨의 삶은 곧바로 분단의 역사였다. 그는 생전에 장기수들이 한 사람도 옥에 안 남고 다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들이 북에 남아있는 가족들 얼굴이나마 보고 죽게 오가게는 했으면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숨 쉬듯 말했다.
“제일 좋은 건 통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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