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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 |
비전향 최장기수 김선명 (1925~2011)
감옥살이
1995년 9월 1일 자 한겨레신문 1면에 나온 ‘반세기만의 모자 상봉’ 사진. 칠순의 아들과 구순의 어머니가 부둥켜안은 모습이다. 대한민국 하늘 아래 그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살아야 했던 이들의 운명은 분단의 아픈 현대사와 맞닿아 있다.
1925년 2월 20일 경기도 양평에서 7남매 중 장손이자 둘째로 태어난 김선명 선생은 열일곱에 창화방직공장, 철공소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가장 역할을 했다. 해방 후 영등포특별자위대에서 노동운동과 청년운동에 전념한다. 1951년 인민의용군으로 철원지구를 정찰하다 붙잡혀 15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다가 간첩죄가 추가되어 무기징역으로 43년 10개월간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 오랜 감옥살이 중 34년을 0.75평 독방에서 지내다 1989년 민가협 양심수후원회를 통해 영치금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세상과 만나기 시작했다. 2003년에 만들어진 김선명 선생의 삶을 다룬 <선택>이란 영화에서 비전향 장기수의 혹독하고 모진 옥중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다큐멘터리 <풀은 풀끼리 늙어도 푸르다>에서 왜 전향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고 먼저 간 친구들, 아버지, 누이동생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였다.”라고 말한다.
출소 이후의 삶
1995년 형집행정지 8·15특사로 대전교도소를 나왔다. “남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두 누이 말고도 동생 4명이 더 있지요. 하지만 감옥을 나온 지 5년이 넘었지만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어요. 그들 입장에서 저는 ‘화근덩이’였거든요. 이제 북으로 가렵니다. 출옥한 지 보름 만에 만난 어머니도 3개월 만에 돌아가셨고요….” 연좌제로 고통 받았을 가족에 대한 그의 소회가 안타깝고 쓸쓸하다. 출소 이후에도 이처럼 다른 장기수 어르신들과 마찬가지로 가족과 떨어져 보안관찰 대상자로 감시를 받으며 생활했다. 1973년 전향 공작 당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며 눈이 나빠져 백내장으로 고생하게 되지만 감옥살이 중 사망신고가 되어 있어 제대로 치료조차 받을 수 없었다. 다행히 얼마 후 주민등록증을 갱신하고 백내장 수술을 받을 수 있었고 건강도 되찾을 수 있었다. 송환 전까지 그가 지냈던 낙성대역 근처 ‘만남의 집’을 찾았다. 지금은 비전향 장기수 두 분과 (사)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가 있는 곳이다. 그곳에 남아 있는 관악구 시범 보건복지사무소에서 만들어준 액자 사진, 자필이 남아 있는 신문기사 스크랩 파일, 단행본 《0.75평 지상에서 가장 작은 내 방 하나》에서 선생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옳은 세상
2000년 9월 2일 6.15 공동선언 후속 조치로 비전향 장기수 1차 송환이 있었다. 비전향 장기수 중 예순세 명이 송환되고 서른세 명이 남았다. 현재 생존자는 열다섯 명이다. 북으로 송환되고 가정을 꾸린 선생은 2011년 8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끝까지 옳게 살아 다시 만납시다.”
선생이 눈빛을 빛내며 말한 옳은 세상은 빈부의 차이가 없고 노동자·농민이 주인 되는 사회였다. 또한, 통일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국가보안법 폐지와 양심수 석방에 앞장서는 일이라고도 했다. (사)정의·평화·인권을 위한 양심수후원회 소식지에 의하면 현재 양심수는 이석기 전 의원 등 국가보안법 구속자와 노동운동 관련자 열네 명이다. 1993년부터 매주 목요일에 탑골공원에서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목요집회가 열리고 있다.
당신의 신념은 그렇군요 당신의 기다림 당신의 싸움 당신의 신념은 그 깜깜한 절망 속에서도 먹기를 거부하는 당신의 염통이군요 … (중략) … 당신의 신념은 이 겨레의 감옥 그 높은 담장 헐고 김선명 총각할아버지여 활개치며 성큼성큼 걸어 나오십시오
1993년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공연에서 故 문익환 목사가 낭송한 시 <43년 김선명 할아버지께 바치는 시> 중에서
- 강지현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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