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보고 싶은 얼굴》에서 만나는 여섯 번째 얼굴 - 이한빛
이한빛은 교사 부부의 큰 아들로 경기도 의정부에서 1989년 태어났다. 그는 2008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하였다. <웹진 자하연잠수함 편집장> 등의 언론활동, 사회대 과/반 학생회장 연석회의 집행위원장 등의 학생회 활동, 이랜드 그룹 박성수 회장 규탄 ‘성수대첩’ 기획 활동 등 하나의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범주의 운동을 넘나들며 활동을 이어갔다. 그가 했던 활동의 백미는 서울대 비상총회 성사를 위한 TF 팀장이었다. 68혁명의 <우드스탁>을 참고하여, <본부스탁>을 개최하고, 장기간 학교본관 점거를 다양한 문화기획을 통해 버텨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관성이 된 활동에 기대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기획들을 찾아 나선 데에는 그런 성격이 작용했을 것이다. 한빛이는 자기가 새로운 공간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 새로 벌인 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하곤 했다. 그때 그의 말투는 항상 들떠 있었고, 누구와도 다른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는 즐거움에 가득 차 있었다.” ― 한빛 PD와 대학시절 함께 활동했던 동료의 글
대학을 졸업하고 드라마 PD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운동을 그만둔 이후에도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일찍 퇴근했기에 시간이 생겼다. 그래서 구의역에 갔다. (중략) 구조와 시스템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죽음이란 비참함. 생을 향한 노동이 오히려 생의 불씨를 일찍, 아니 찰나에 꺼뜨리는 허망함. (중략) 얼굴조차 모르는 그이에게 오늘도 수고했다는 짧은 편지를 포스트잇에 남기고 왔다. ‘오늘’이라 쓰지 않으면 내가 무너질 것 같기에 오.늘.이라 힘주어 적었다.” ― 구의역 사고에 대한 한빛 PD의 글
한빛 PD는 생전에 4.16 연대, KTX 해고 승무원, 빈곤사회연대 등을 후원하였다. “급여가 통장에 박혀 있었다. 첫 월급이라, 모아 놓은 게 없어서, 돈 갚아야 하니까, 집 살 예정인데, 등등 단서조항 붙이면 영원히 미루게 된다. 막상 월급을 받으니 얼마 되지도 않는데 10~20%를 누구 코에 붙일까싶어 절반을 확 질렀다.” 한빛 PD는 공군참모총장표창, 방송문화진흥회비평상 등 여러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며 드라마 PD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었다. 결국 CJE&M의 PD로 입사하여, 드라마 <혼술남녀>의 조연출로 제작에 참여하였다.
“드라마에서는, 스토리가 있고 사람들에게 감정을 전달하잖아요. 사랑이라면 사랑, 분노라면 분노, 기쁨이라면 저 역시 기쁨. 드라마를 통해 감정들을 전달받았거든요. 제가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정을 전달하는 영상을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 ‘세상과 연애하기’ 인터뷰 중
드라마를 통해 따뜻한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한빛 PD, 하지만 현장은 오히려 착취와 불행만이 가득했고, 오직 썩은 관행과 타협만이 가능했다.
“촬영장에서 스텝들이 농담 반 진담 반 건네는 ‘노동 착취’라는 단어가 가슴을 후벼 팠어요. 물론 나도 노동자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그네들 앞에선 노동자를 쥐어짜는 관리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 이한빛 PD의 유서 중
만드는 사람이 행복한 드라마 현장을 꿈꾸었던 한빛 PD의 바람은, 그가 떠난 이후에야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CJ E&M은 한빛 PD 유가족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하며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였고, 한빛 PD의 유지를 이어 받아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설립되었다. 그렇게 방송 현장은 하나 둘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기 바쁘다며 앞만 보는 경주마처럼 달려 나갔을 때, 너는 조용히 몸을 돌려 아무렇게나 짓밟힌 차가운 흙길을 두 손으로 어루만졌다.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네가 남긴 것은 따스한 체온이었다.” ― CJ E&M 회사 동기 추모사 중
한빛 PD는 따뜻하면서도 예민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의 친구들은 한빛 PD를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나 혼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선 모두가 너와의 첫 만남을 어떤 방식으로든 상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은 처음을 반추하게 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주어진 시공간을 누구보다 찬란하게, 반짝이게, 치열하게 살아냈던 사람. 너를 사랑했던, 네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너를 그렇게 기억한다.” ― 한빛 PD 추모집 발간사 중에서
# 이우광 작가
포항에서 나고 자랐다. 스물일곱이라는 늦은 나이에 다시 미대에 들어가 회화를 전공했고, 대학원을 핑계로 서울에 올라오게 되었다. 힘들게 들어간 대학원이었지만 한 학기를 끝으로 자퇴를 결정하게 됐고, 그 무렵 공공미술팀에서 만난 친구들과 이름도 특이한 '가난뱅이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 책읽기 모임으로 시작한 '가난뱅이모임'은 저렴한 삶 속에서 대중교통 대신 자전거를 타고, 함께 도시락을 나눠 먹으며 지속가능한 삶을 탐구하는 자족적인 모임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미술과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며, 도시 속을 유랑하는 생태주의자, 가난한 몽상가들이었다. 2009년 수유마을시장 공공미술 '문전성시 프로젝트'에서 '예술노점상'이라는 작업을 시작으로 주로 공공미술작업을 해왔다. 2011년 성북예술창작센터에서 수집과 생활예술을 접목한 '별을 줍는 사람들'이라는 프로젝트를 '가난뱅이모임'에서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그 외, 마을 만들기 작업에 소소하게 참여하기도 했고, 틈틈이 도시농부학교를 다니며 미래의 자급자족을 위한 텃밭농사를 함께 꾸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