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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보고 싶은 얼굴》에서 만나는 다섯 번째 얼굴 - 최종범
2013년 10월 31일, 천안의 한 도로 차 안에서 한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차 안에 번개탄을 피워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였다. 차 안에는 별도의 유서가 없었다. 하지만 바로 전날 자신이 속한 모임의 단체 메시지 방에는 이런 글이 남아 있었다.
이 글을 남기고 연락이 두절되었던 그가 다음날 목숨을 잃은 채 발견된 것이다. 삼성전자서비스노조 천안분회 회원이었던 최종범이다.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학창 시절 가세가 기울어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고등학교도 공업계로 진학했다. 그리하여 2010년 얻게 된 직장이 삼성서비스 천안센터였고, 업무는 에어컨 수리 전문기사였다.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결혼도 하고 딸도 낳았다. 그러나 수입은 늘 불안정했다. 에어컨 수리는 계절을 탔다. 여름에는 한 달에 400만 원도 벌었다지만, 주유비 등의 비용을 자비로 부담해야 했기에 실제 손에 들어오는 돈은 한 달 200만원 정도였다.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일해야 그만큼이었다. 비수기에는 이 금액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같은 처지의 서비스 기사들이 모여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2013년 7월의 일이었다. 회사의 위장도급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기사들의 처우개선을 요구했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건설되고 전국에 분회가 생기면서 최종범도 천안분회에 가입한다.
민주노총과 시민사회단체는 열사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삼성 사용자에게 노조탄압 중단과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교섭할 것 등을 요구했다. 19일 간 삼성 본관 앞에서 노숙 농성 투쟁을 하고, 51일 간 싸웠다. 그 결과 삼성전자서비스 지회는 12월 20일 삼성전자서비스가 교섭을 위임한 한국경영자총협회와 합의에 이른다. 최종범은 사후 55일만에야 비로소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고단했던 영혼을 뉘었다. 삼성은 화해 제스처를 썼다. 노동자들의 생활임금과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무자비한 노조 탄압으로 ‘무노조 역사’를 자랑해온 삼성이다. 노조를 파괴하기 위한 전략은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공작은 계속되었다. 1990년 경남지역 삼성노동조합 설립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91년 노조 설립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뒤 무려 28년째 삼성을 상대로 복직투쟁을 해온 김용희 씨가 삼성노조 파괴공작 피해의 산증인이다. 노조 설립을 막기 위해 삼성은 그를 해외에 파견하려 했고, 간첩으로 고발하기도 했다. 30대에 해고되어 올해 정년퇴직 연령인 60세를 넘긴 그는, 현재 삼성의 사과와 원직 복직 합의를 요구하며 서울 강남역 사거리 삼성전자 사옥 앞의 철탑 위로 올라가 고공농성 중이다. 삼성 노동자들의 부자유는 현재 진행형이다. 최종범의 죽음도, 그래서 현재 진행형이다.
# 박미화 작가
어릴 적부터 손으로 뭔가를 만지작거리며 만들기 놀이하는 걸 좋아했다. 자연스럽게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대학에선 교육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좋은 사회엔 좋은 교육이 필요하다며. 졸업 후 미술교사가 되어 아이들에게 정을 듬뿍 쏟았다. 건강 문제로 퇴직하고 아이를 낳고 점점 세상을 알아 나갔다.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대학원 공부를 하게 되었다. 가슴 속에서 뭔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졌다. 어쩌다 보니 미술작가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할 거 열심히 해 보자 싶었다. 매일매일 이것저것 공부하면서 더 많이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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