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보고 싶은 얼굴》에서 만나는 첫 번째 얼굴 - 조지송
“나는 노동조합 운동이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는 데 유일한 방법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노동조합을 노동자들의 교회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인간의 권리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민주주의를 배우고, 이웃사랑을 배우고, 희생과 봉사를 배우고,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우며,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것도 실천적으로 배우고, 참 평화가 무엇인지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지송 목사는 1933년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다. 61년 장로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63년 예장통합 경기노회에서 한국교회 최초 산업전도 목사로 안수받았다.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초대 총무를 맡아 20년간 현장에서 헌신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맞서며 천주교의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JOC)와 더불어 한국노동운동의 초석을 다진 선구자로 꼽힌다.
그는 신학교 3학년인 61년부터 영등포 산업전도위원회 실무목사로 취임하기 전인 64년 2월까지 탄광, 철광, 섬유공장과 중공업 공장에서 직접 노동을 경험했다. 경제·산업·노동·인구문제 등을 공부하기 위해 경제기획원, 상공회의소, 한국노총 등을 오가며 연구와 훈련을 거쳤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주선으로 미국 루스벨트대학에서 산업선교 관련 연수를 받기도 했다.
초기에 조 목사는 공장에 가서 설교하고, 기숙사에서 성경 공부를 이끌고, 노동자들을 심방하는 등 ‘선교’에 주력했다. 특히 공장 대표들을 대상으로 산업신학, 평신도 신학, 성서의 노동관, 노동운동, 경제문제 등 강의하고, 체육회·음악회 등을 열어 산업전도 교육을 했다. 하지만 60년대 후반부터 탈농촌 도시 유입이 늘어나면서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과 동떨어진 ‘개인 선교의 한계’를 절감했다. 이들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해주는 것이 본인의 사명임을 깨닫게 된다.
그 후 그는 기독교인, 노동조합 간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조합, 근로기준법, 협동조합, 건강과 윤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육사업과 조직운동을 실시하였다. 1972년 영등포산업선교회는 100여 개의 노동자 그룹을 조직, 운영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직을 토대로 원풍모방을 비롯하여 여러 사업체에서 임금체불, 노조결성, 부당노동행위 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가난한 노동자의 월급을 잘 모으고 잘 쓰기 위한 신용협동조합도 만들었다. 1978년 정부 탄압으로 신용조합이 해산되었지만, 그 이후에 생긴 다람쥐회가 그 정신을 이어받아 지금도 가난한 이들의 소중한 금고가 되는 신용협동조합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조지송 목사가 활동했던 1970년대는 한국 근현대사의 암울한 시기였다. 이제 막 노동조합들이 생겨나고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교육을 해왔는데 그 첫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유신’, ‘긴급조치’ 등이 발표되었다. 정부는 노동운동 및 영등포산업선교회의 활동을 ‘빨갱이’로 치부하며 누명을 씌우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산업선교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노조 간부들은 숨어버렸고, 교회조차도 ‘신앙이 없는 집단’이라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 산업선교회를 지켰던 이들은 조지송 목사와 함께했던 어린 여공들이었다. 그들에게 조지송 목사는 아버지와도 같았다. 조지송 목사는 이들의 모습을 ‘바보들의 행진’이라 표현했다.
조지송 목사는 50세가 되던 1982년경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산업선교 현장을 떠났다. 1985년부터 충북 청원군 옥화리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그는 자신이 만약에 북쪽에서 내려오지 않고 살았더라면 아마도 예술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옥화리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동료들에게 손수 만든 카드를 보내곤 했다. 도시산업선교 활동을 하던 많은 노동자들은 조지송 목사의 집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며 위로를 받았다.
2008년경 파킨슨병이 발병해 치료를 위해 성남시 판교로 이주하였다. 많은 이들이 조지송 목사의 사역과 뜻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을 남기고 자료들을 모았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들이 주인공이 되는 산업선교 운동에 본인의 이름이 너무 부각될 것을 염려하여 생전에 당신의 이름을 남기는 자료들을 출간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병문안을 간 후배에게 “진리는 절대 패배하지 않습니다.”라고 격려해주는 곧고 맑은 정신의 소유자였다.
# 오민욱 작가
자본주의와 냉전, 도시와 개발, 그 언저리에서 선택되거나 배제된 형상들은 무엇인지 다큐멘터리 형식을 통해 질문하고 있다. 6월 항쟁,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 백악기에 형성된 암석군, 부산의 기지촌, 거창양민학살사건, 동아시아의 두 해협 등에 관한 작품이 그 실천의 결과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