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보고 싶은 얼굴》에서 만나는 여섯 번째 얼굴 - 권문석
함께 있을 때 존재감이 드러나는 사람도 있지만, 부재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필요한 때에 필요한 일을 해내는 사람들, 서른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권문석도 그런 사람이었다.
2013년 권문석은 알바연대 동료들과 함께 ‘최저임금 1만원’운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토요일이었지만 2014년 최저임금위원회를 앞두고 ‘최저임금 1만원 종일특강’을 진행하고 저녁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없는 주말을 보내기 위해 젖먹이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간 아내를 기다리며 집안을 청소했다.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를 씻겼다. 아이와 아내의 잠자리를 봐주고 여느날처럼 거실 소파에 누웠다. 오랜만의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6월 2일 새벽 급성심장마비가 찾아왔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1996년 학생운동을 시작으로 오랜기간 사회운동을 해온 고인과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로 장례식장이 가득찼다. 추모식을 준비하던 그의 동료들은 권문석의 사진을 찾느라 고생을 해야했다. 돌이켜보면 그는 글을 쓰고, 무대 뒤를 지키고, 혼자서라도 연대집회에 깃발을 들고 나가던 사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는, 빛나지 않는 자리를 자처하던 사람이었다.
최저임금 1만원, 세상의 상식을 바꾸다
권문석이 ‘최저임금 1만원’ 운동을 시작했던 2013년의 최저임금은 4,860원이었다. 몇 해 째 210원, 260원, 280원. 껌 한 통 값도 안되게 최저임금이 우습게 오르고 있던 때였다. 모두들 최저임금 인상액은 몇 백 원 안짝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권문석이 몸담고 있던 알바연대가 ‘최저임금 1만원’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2013년에 이미 알바시장은 사회경험을 쌓기 위해 학생들이 잠시 머무는 곳이 아니라, 경제불황의 시기에 새롭게 형성된 저임금 불안정 노동시장이었다. 권문석은 알바연대 동료들과 동물모양의 잠옷을 입고 밤새 편의점과 커피전문점 등을 돌아다니며 알바노동의 실태를 조사했다. 그리고 그들은 알바생이 아닌 ‘알바노동자’들과 함께 최저임금 인상운동을 시작했다. “최저임금은 최저임금 노동자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액수여야 한다. 최저임금은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는 당사자들의 의사가 반영되는 구조로 사회가 함께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문석은 최저임금에 대한 상식을 바꾸었다.
기본소득 운동의 밑바탕을 만들다
3년간의 산업체 병역특례로 군문제를 해결하고, 권문석은 2007년 10월 한국사회당 금민 후보 대선 캠프에 합류하며 본격적으로 정당운동을 시작했다. 2008년 한국사회당 기획위원으로 일하던 권문석은 촛불정국을 거치며 고민이 깊어갔다. 시민들은 ‘광우병 소고기 수입반대’와 ‘공공영역의 신자유주의 사유화 반대’를 외쳤지만, ‘비정규직 철폐’는 광장의 구석에서 중심으로 확산되지 않았다. 그는 진보정당이 현정부의 정책에 대한 반대를 넘어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상을 설득력 있는 언어로 시민들에게 제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완전고용이 불가능해진 사회에서 사회구성원들의 인간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조건없는 기본소득’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권문석은 기본소득이 한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밑바탕을 만들었다. 2007년 대선과 총선에서 ‘기본소득’을 대표 공약으로 제시했던 사회당에서 2009년부터 기본소득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에 결성된 기본소득네트워크의 운영위원으로 참여해 실질적인 사무국장의 역할을 했다. 2010년에는 집행위원장으로 1월 27일부터 삼일간 ‘기본소득국제학술대회’도 치렀다. 이후에도 다양한 언론에 기본소득과 관련한 글을 기고하고, 토론회를 기획하고, 동료와 함께《기본소득노트》라는 소책자도 발간했다. 그러나 기본소득 운동은 그의 바람과 달리 운동의 주체가 잘 형성되지 않았다. 권문석은 불안정노동의 당사자인 알바노동자들에게서 희망을 발견했다. 최저임금 인상과 기본소득 도입운동을 함께 해보고 싶었다.
권문석은 생의 마지막 시간을 ‘최저임금 1만원’과 ‘조건없는 기본소득’을 붙들고 살았다. 기계에게 일자리를 내주어야 했던 신문사 식자공의 아들, 하숙집을 운영하며 평생 자신의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어머니의 아들 권문석. 노동의 고단함과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노동으로부터의 배제와 그 이후의 삶을 담담히 겪었던 그는 민주주의 국가의 의무가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불안정 노동자들과 학자들과 사회운동가들과 함께 최저임금 1만원과 조건없는 기본소득 현실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남은 자들은 알고 있다.
# 이하 작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서야 짜장면과 돈가스를 처음 먹어본 촌놈이라고 스스로를 칭한다. 대학에서 회화를 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신문사 시사만화가, 영상제작업체 애니메이션 제작자, 대학 강사 등의 직업을 거쳤으며 10여년 전부터 화가의 길을 가고 있다. 지난 정권, 정치인 풍자그림을 거리에 붙이거나 뿌리는 행위로 여러번의 재판을 받았다.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믿고 행하는 화가이며 통일운동을 하고 싶어하는 화가이다. 현재 민예총 이사로 있으며 페이스 북에 이하의 풍자일기를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