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보고 싶은 얼굴》에서 만나는 다섯 번째 얼굴 - 최옥란
2002년 2월 수급권 재심사를 위해 소득 및 재산신고를 하라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이 때 수급권을 포기하고 양육권을 찾기로 결심한 최옥란은 양육능력을 위한 재산 기준과 직업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으나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세상은 또다시 넘어설 수 없는 벽으로 다가왔다.
1996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최옥란은 태어난 지 100여 일만에 심한 열병을 앓았고 그 후 평생 뇌성마비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장애와 빈곤 속에서도 학업에 대한 열망을 놓지 않았던 그는 24세에 대학입시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뇌성마비 1급 장애도 그의 열정을 꺾을 수 없었다. 최옥란은 장애인문제연구회
‘울림터’와 뇌성마비연구회 ‘바롬’ 창립,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 활동 등 장애인 인권운동의 맨 앞에 섰다. 그는 장애인 중에서도 뇌성마비 여성 장애인이었으며, 어머니이자 노점상 그리고 수급권자였다.
장애와 빈곤이라는 굴레
장애인, 빈민, 여성이라는 약자의 굴레는 그를 한없이 강하게 만들었고, 또 힘없이 무너지게도 하였다.
아파트 관리비 160,000 원
전화요금 25,000 원
통원치료 교통비 120,000 원
의약품 구입비 133,000 원 등
한 달 총 생활비 639,500 원
- 최옥란 2001년 3월 가계부 中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요구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였을 당시 그에게 주어진 생활비는 기초생활 수급비 26만 원과 장애수당 45,000 원이 전부였다. 그녀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현실화와 수급권 반납 투쟁을 하기 위해 거리에 나섰다. 보건복지부의 최저생계비 산정 방식에 대해 위헌소송을 내는 데도 함께 했다. 2001년 최옥란은 “우리도 이동하고 싶다.” “우리도 버스를 타고 싶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휠체어로 지하철과 버스를 타는 시위를 벌였다. 뇌성마비 1급인 그녀는 말로 자신의 요구나 분노를 표현할 수 없었다. 이마에 땀이 흐르고 몸은 피로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막아서는 전경들을 향해 최옥란은 휠체어를 계속 몰아갔다.
장애인도 엄마다
“ ‘엄마 글로 써 줘. 사 올게.’ 그래서 써 주면 사 오고. 엄마를 전혀 무시하지 않는 준호”
최옥란이 포기하지 않고 그토록 집요하게 장애인 빈민운동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아들 준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28세에 결혼을 하고 준호를 갖게 된 것은 고달픈 세상살이에 한 줄기 작은 빛이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혼 후 준호에 대한 양육권을 얻기 위해 최옥란은 청계천에서 노점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월 33만 원 이상의 소득이 있는 사람은 수급자격이 박탈된다는 법규에 따라 노점상을 포기해야만 했다. 어떻게 호소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2002년 2월 20일, 아들의 양육권과 수급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그는 과산화수소수 2통과 수면제 20알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다.
벽 앞의 웃음
한 달여의 치료 끝에 3월26일 심장마비로 힘겨운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장례 행렬은 경찰의 시내 진입 저지로 노제조차 맘대로 지낼 수 없었다. 턱없이 비현실적인 장애인 복지 정책과 사회의 편견과 무관심은 빈곤여성장애인의 아름다운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최옥란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되던 2005년, 그가 시작했던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결실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이 제정되었다. 오늘도 수많은 가난한 여성 장애인들은 사회적 억압과 고통에서 벗어나 웃을 날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 정정엽 작가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한 작가는 유쾌발랄한 예술전략가이다.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그룹 ‘입김’의 멤버로 활동했고 회화, 드로잉, 설치, 퍼포먼스 등 미술의 여러 범주를 넘나들면서 “예술의 평화적 충돌이 가장 싼 값에 공존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는 여성현실과 노동, 환경, 평화 등의 구조적 문제 해결법으로 현실의 예술화, 예술을 통한 삶을 그린다.
“나의 서랍 속에 있던 최옥란의 웃음은 2007년 ‘사라지는 여자들’ 추모 웹사이트 작업으로 만났다가 2018년 《보고 싶은 얼굴》작품으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세상의 고통과 어려움을 아프게 날려 버리는 큰 웃음, 100호의 캔버스에 그 웃음이 색채로 소리로 꽝 꽝 울리길 기대합니다.” 〈벽 앞의 웃음 - 최옥란〉 작업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