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보고 싶은 얼굴》에서 만나는 네 번째 얼굴 - 장현구
“경찰의 가혹행위가 양심적인 한 청년의 정신을 앗아가더니 끝내 그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1995년 12월 4일, 장현구는 송파구 일신여상 앞 구름다리 아래서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은 그는 열흘 간의 투병 끝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왜 분신했냐는 질문에 그는 “속죄하고 싶었어요.”라고 답했다.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난 장현구는 대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9년 성남에 있는 경원대(현 가천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어린 시절의 일화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동네 친구들과 야구를 하던 중 다른 아이가 유리창을 깨고 줄행랑을 쳤다. 어린 현구는 자기에게도 책임이 있다면서 도망치지 않고 아버지에게 유리 값을 물어달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 도망가면 아저씨가 불쌍하잖아요.”
대학생 현구는 해박한 지식으로 후배들의 고민을 쉽게 잘 풀어주는 선배로 소문이 났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장 박사’였다. 그런 그를 과 후배들이 따랐다. 그는 용돈을 벌기위해 막노동 등 아르바이트를 해서 힘들게 모은 돈을 갑자기 다친 후배를 위해 선뜻 내놓기도 했다. 이토록 자신의 이익을 챙기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로 남을 배려하고 희생했던 그였다. 그런 성격이었기에 그는 노태우 군사정권 시절 민주주의와 통일을 외치는 학생운동을 외면할 수 없었다. 더구나 당시 경원대학교 사학재단의 비리와 폭력은 상식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교직원은 학생회 간부를 신입생이 보는 앞에서 구타하기 일쑤였다. 학생들의 인권은 헌신짝처럼 내동냉이쳐졌다. 1992년 2학년이 된 장현구는 공대학생회 학원자주화 추진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그는 사학재단 비리척결을 요구하며 시위와 집회를 주도했으며 잦은 점거농성을 하게 되었다. 학교 측은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학생들을 제적하고 쓰레기 투기, 업무방해, 무단점거 등으로 마구 고소하였다.
일상이 되어버린 제적과 고소 그리고 경찰의 가혹행위
그 해 말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장현구는 공정선거감시단 활동을 하던 중 경기 성남 중부경찰서에 잡혀가
구속되었다. 아버지 장남수 씨는 “경찰에서 3일 동안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해 그때부터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날 아버지는 양손을 뒤에 묶인 아들에게 밥을 떠먹여주어야 했다. 경찰은 그렇게 묶인 상태로 잠도 재우지 않고 물 한 모금 주지 않는 등 가혹행위를 했다. 그는 이듬해 2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현구는 총장실에 감금당한 채 교수와 직원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하는 일을 겪게 된다. 경원대에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이 된 입시 부정사건이 벌어졌다. 그는 학원자주화추진위원장으로 총장과의 단독면담을 하러 총장실에 들어갔다가 그렇게 된 것이었다. 학생들은 문밖에서 3시간 동안 구타당하는 장현구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어야만 했다. 그 후부터 그는 심한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꽃밭 가득한 밝은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그런데 누가 막 잡아가려고 해요
정신병원에 입원해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으나 누군가 늘 감시하고 있다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시계공장과 제과점을 전전하며 건강한 삶을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때마다 두통이 심해져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두어야 했다. 그는 세 번 자해와 자살기도를 하였다. 경찰과 학교 측의 야만적인 고문과 폭력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끝내 자신의 몸뚱이를 속죄물로 내놓았다. 오랫동안 준비를 했는지
나중에 보니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이나 물건들을 다 정리한 상태였다.
유족과 학생들은 학교 측의 공개 사과와 고문 수사에 대한 경찰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장례식을 무기한 연기하고 163일간 투쟁하였다. 학생들은 경찰병원에 안치된 그의 시신을 지키며 5개월간 투쟁하였고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사회에 알리기 위해 만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언론은 서울 변두리의 한 학교에서 벌어진 학생의 죽음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가 만약에 서울의 명문대 학생이었더라면 어땠을까?
학교 측은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지칠 대로 지친 학생들과 가족들은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한 채 4월 25일 장례를 치르고 마석 모란공원에 그를 모셨다. 그를 가혹하게 수사했던 성남 중부경찰서 앞을 장례행렬이 지나가려했으나 엄청난 최루탄이 발사되었으며 장례행렬은 흩어지고 말았다. 아버지 장남수 씨는 4.19때 시위대의 선두에서 죽음을 목격했다. 그랬던 그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헌신하다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아들과 함께 하기 위해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활동을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아버지의 투쟁으로 그는 2001년 민주화운동관련 사망자로 인정받았다.
# 조습 작가
근대성과 전근대성이 서로 빗겨 어긋나 있지만 공존하는 지금의 사회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해왔다. 국가와 민중, 비탄과 명랑, 논리와 맹목의 상충되는 개념들을 충돌시키면서 현실 이데올로기에 흠집을
내고 있다. 작품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충돌 지점에서 뜻밖에 만나는 아이러니한 주체의 이야기이다. 유쾌하면서도 불온한 상상력을 통해 연출된 이미지는 이성적 주체의 안락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상호 이해의 지평으로 건너가기 위해 행하는 어떤 불모성에 관한 것이며, 불모성 속에서도 꿈꿔야 하는 새로운 주체 이행과 동체에 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