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보고 싶은 얼굴》에서 만나는 두 번째 얼굴 - 권미경
이름을 찾고 싶었던 노동자
1991년 초겨울, 한 여성 노동자가 근무하던 공장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 유서 분실을 염려해서인지 왼팔에 유서를 남겼다. 그 유서의 마지막 구절은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였다.
권미경이 근무했던 (주)대봉은 부산에 있는 신발 제조업체였다. 전체 사원 3500여 명 규모의 회사로 내수와 수출을 겸하고 있었다. 1990년대 들어 신발업계의 경영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무더기 도산 사태가 일어났다. 신발업체에서는 ‘30분 더 일하기 운동’, ‘불황극복 50일 작전’, ‘3무(무불량, 무이탈, 무미달) 운동’, ‘무임금 1시간 더 일하기 운동’ 등 착취강화 운동을 벌였다. 그가 일했던 (주)대봉도 1991년 11월부터 전체 사원에게 ‘원가절감, 결근방지’라는 깃을 강제로 달게 했다. 12월부터는 작업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관리직 사원들이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정신교육과 강제잔업을 시켰다. 관리자의 훈시를 듣느라 저녁식사도 못한 채 잔업을 하기도 했다. (주)대봉에서는 여느 신발공장과 마찬가지로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했다. 관리자들은 엄연히 있는 노동자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권공순”, “박공돌”로 불렀다.
가난했지만 꿋꿋했던 여성
권미경은 1969년 6월 24일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다. 1971년 부산으로 이사해 1982년 부산 아미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보세공장 노동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홀어머니는 완구공장에 다녔고 네 살 터울 오빠도 노동자였으며 여동생 둘이 있었다. 공장에 다니면서도 1985년에 야간제 동주여중을 졸업했다. 가난했지만 비루하지 않았다. 꿋꿋하게 공부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여성이었다. 그는 1991년 지역 노동자들의 독서모임인 ‘도서원 광장’에 나가면서 노동자 의식에 눈을 떴다. ‘도서원 광장’은 1989년 노동자 문화공간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그의 일기장 갈피마다 광장에 대한 애착이 담겨 있다.
“오랜 세월 애타게 갈망해오던 그런 사람들이 여기 있었다. 바로 이곳 ‘광장’에. 그들과 언제까지나 함께하고 싶다.”(1991년 5월7일 일기장)
인간답게 살고 싶었던 젊은이
1991년 12월 6일 오전, 권미경이 근무하는 곳에 바이어가 품질검사를 나왔다. 야간학교 학생인 동료 노동자가 불량을 냈고 바이어가 이것을 보게 되었다. 바이어가 사라지자 조장과 반장이 불량을 낸 노동자를 심하게 야단쳤다. 직책 높고 나이 많은 남자가 낮은 직급인 어린 여성의 실수를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다루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권미경은 같은 라인의 동료에게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느냐? 이곳이 바로 지옥이 아니냐?”고 말하며 울먹였다고 한다.
노동 강도는 높아졌고, 무임금 잔업이 늘어나고, 불량에 대해 비인간적으로 닦달하고. 누군가는 잘못되었다고 외쳐야 했다. 자존감이 높고, ‘광장’을 통해 부당한 것을 민감하게 느끼게 된 그, 자신이 질책당하는 것만큼 동료가 질책 받는 것을 아파했던 그가 나섰다. 스물 셋, 짧은 생을 마감하는 그는 세상에 다음과 같은 절규를 남겼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 차가운 억압의 땅에 묻지 말고
그대들 가슴 깊은 곳에 묻어주오.
그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으리.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 류준화 작가
경북대학교와 홍익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다. 결혼을 한 이후에야 여성의 현실에 눈을 뜨고 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여성미술연구회에서 《여성과 현실》전 및 공공 프로젝트들에 참여하였고 이후 페미니스트그룹 ‘입김’을 결성하고 여성주의 미술에 대한 다양한 실험과 전시들을 하였다. 30대 중반에 삶의 터전을 도시에서 농촌으로 옮겼다. 단지 작업장을 농촌으로 옮긴 것이었으나 농촌지역에서 살다보니 마을공동체에 애정이 생겨 이런 저런 마을 사업을 하기도 했다. 이제는 농촌의 일상이 몸처럼 밀착되었고 그림과 세상이 어떻게 연결될지를 고민하며 그림에 전념하고 있다. 17여 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