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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 |
2018년 《보고 싶은 얼굴》에서 만나는 첫 번째 얼굴 - 이덕구
1949년 6월 8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 십자가에 묶인 한 시신이 전시되었다. 윗도리 왼편 주머니에는 손잡이를 반으로 자른 숟가락이 꽂혀있었다. 제주4.3 인민유격대원들은 갖고 다니기 편하게 부러진 숟가락을 사용했다. 부러진 숟가락은 ‘빨치산의 인식표’로 불렸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내는 제주4.3 인민유격대 제2대 사령관 이덕구였다.
이덕구는 1920년 제주 조천면의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일본으로 건너가 리츠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가 태평양전쟁을 겪었다. 일제 패망 후 해방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꿈을 안고 제주로 돌아왔다. 고향의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을 가르쳤고, 남로당 제주도당 활동도 하였다. 1947년 3월 1일 ‘3.1절 28주년 김녕 제주도대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숨지고 5백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 중 3명이 고문치사를 당한다. 이에 공장, 상가, 학교뿐 아니라 미군정청 직원과 공무원까지 참여한 총파업이 일어났다. 미군정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투입하여 2500여명을 검거, 투옥한다. 이에 대한 제주도민의 반감이 커져갔다. 1948년 5월 10일에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일본인데, 피해자였던 우리나라가 분단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단선반대’와 ‘미제축출’을 내걸고 4월 3일 제주도 전역에서 무장대가 경찰지서 등을 습격하면서 제주4.3이 시작되었다. 이덕구도 이 항쟁의 선봉에 있었다. 주민들의 투표거부로 제주에 설치된 3개 투표소 중 2곳은 투표자 수가 모자라 선거무효가 되었다. 무장대는 제주도민의 자발적인 식량 의복 보급과 지원 속에 ‘인민유격대’로 개편돼 활발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선거 이후 육지에서 토벌대가 파견되었다. 여수, 순천지역 군인들이 파병을 거부하며 여수순천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해 여름 인민유격대 사령관이던 김달삼이 해주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러 가면서 이덕구에게 모든 직책을 맡긴다.
토벌대는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안 마을로 옮겨 유격대와 분리시키고 ‘초토화작전’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 이덕구 부대는 도청과 경찰지서를 습격하기도 하였으나 끝끝내 버티기는 어려웠다. 1949년 6월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실질적인 무장항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 박경훈 작가
제주에서 나서 군 복무 27개월을 제외하고는 제주에서만 살고 있는 제주 토박이. 제주대 졸업 후 잠시 교단에 몸담았으나 대부분 문화예술계에서 활동해왔다. 1980년대 〈그림패 코지〉라는 미술동인을 결성, 민중미술운동을 통해 예술의 현실참여와 사회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목판화와 걸개그림 등으로 제주4.3과 사회현장을 표현했다. 1985년 첫 개인전 이후 현재까지 7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다수의 단체·초대전에 출품했다. 제주4.3진상규명, 제주4.3특별법 제정, 제주4.3평화공원 조성, 제주4.3평화기념관 건립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작가이면서도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 (사)제주민예총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문화 행정가로도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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