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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보고 싶은 얼굴》에서 만나는 여섯 번째 얼굴 - 백남기
농민이자 사회운동가였다. 천주교 세례명은 임마누엘이다. 1947년 전남 보성군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1968년 중앙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박정희 정부시기에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2회 제적을 당했고, 시국사범으로 쫓겨 6년 정도 수배생활을 했다. 이때 명동성당 이기정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된다. 수배기간 동안 수녀원과 농장에서 일했고, 갈멜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생활했다. 1980년 ‘서울의 봄’ 때 복교해 총학생회 부회장을 맡아 학생운동을 이끌다가 비상계엄이 확대되면서 계엄군에 체포되었다. 중앙대학교에서 세 번째 제적되었고, 계엄포고령 위반 죄목으로 징역을 살았다. 이듬해 가석방 후 귀향해 농사를 평생의 생업으로 삼으며, 농민운동과 우리밀살리기운동, 지역운동을 계속 했다. 1986년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하여 전국 부회장을 역임했고, 평생회원이 되었다. 또 우리밀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활동을 병행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이지만 “살아남은 자는 말이 없다”며 끝까지 보상을 거부했다.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안타까워하며, 민주주의 퇴행을 걱정했다.
1981년 11월 박경숙(율리아나)과 결혼해,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고 각각의 이름을 백두산, 백도라지, 백민주화라고 지었다. 민족의 서정과 민주화, 통일을 염원하는 뜻을 담은 이름들이다. 사회운동에 앞장서면서도 가정적이었고, 여린 감성의 사람이었다. 겉으로 무뚝뚝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가족을 아꼈고, 늘 “나는 마누라 없이 못 산다” “클레오파트라보다 예쁜 아내” “오 사랑하는 우리 따님”이라며 애틋함과 고마움을 표현했다. ‘면소재지는 1만 원, 광주는 2만 원, 서울은 5만 원!’ 외출할 때면 아내가 그의 손에 쥐어주는 용돈이었다. 그것도 다 쓰지 않고 남겨서 돌아오는 날은 보관했다가 다음에 나갈 때 다시 들고 갔다 한다. 휴대전화는 물론 그 흔한 신용카드 한 장 사용하지 않는 참으로 검소한 삶이었다.
2015년 11월 14일, 보성에서 상경해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석했다. 이날 집회는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소홀, 농민문제 등에 항의하는 성격이었다. 그도 밥쌀 수입저지, 쌀 및 농산물 적정 가격보장을 요구하며 행진 중이었다. 경찰이 계속 물대포를 쏘자, “이제 다 끝나가니, 그만 쏘라”는 말을 외치며 앞으로 갔다가 직수 물대포를 맞고, 뇌출혈로 쓰러졌다. 코와 입으로 많은 피를 쏟았다. 오후 7시 8분께 서울대학교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져 4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으나 일어서지 못했다. 의식불명 상태로 317일을 병상에 있었다. 2016년 9월 25일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장례는 사망 후 41일 만인 11월 5일 민주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염수정 추기경이 집전한 미사가 명동성당에서 진행되었고 노제를 거쳐 서울 광화문에서 2만이 넘는 시민들과 함께하는 영결식이 열렸다. 이후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되었다. 2017년 8월 중앙대는 그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서울대병원에서 최초로 작성한 사망진단서에는 사망 원인이 병사로 기재되어 논란이 있었다. 또한 사망 하루 전부터 경찰은 서울대병원을 봉쇄, 강제 부검을 우려한 시민들과 대치했다. 경찰은 10월 23일 부검 영장을 집행하려다가 시민들이 막아 실패했고, 25일 영장을 재집행하려다 결국 철수했다. 10월 28일이 되어서야 부검 영장의 재신청과 부검을 완전히 포기했다. 그가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직후인 2015년 11월 18일 가족들과 시민단체 등은 살인미수(예비적으로 업무상 과실치상) 및 경찰관 직무집행법 위반 등의 내용으로 검찰에 고발장을 접수했다. 2017년 6월 15일 서울대병원은 사망 원인을 외인사로 변경했다. 그가 쓰러진 날로부터 676일이 지난 2017년 9월19일에서야 촛불시민혁명으로 인하여 바뀐 정부에서 공식적인 사과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직 당시 경찰 당국의 살인적인 진압에 대한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재발방지를 위한 조치가 진행중이다.
# 김병화 작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홍익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84년 첫 개인전을 <종이 조각전>으로 시작, 기존의 돌, 청동, 나무 등의 경 재료에서 벗어나 연 재료의 실험을 하였고, 1988년 제3회 개인전은 ‘그림시’라는 새로운 장르의 시집을 발행, <시와 조각의 만남전>을 발표하였다. 1991년 ‘대도(大盜)’와 ‘낙루(落漏)’라는 상징을 사용하여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사회 풍자 조각전>을 개최하였고 그것을 끝으로 일반 조각 작품 활동을 접는다. 4~5년간의 형태 실험을 거친 후 1996년에는 삶과 종교 그리고 작업을 하나로 묶는 이른바 <종교 조각전>을 연다. 그 기조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총 13회의 개인전과 2인전을 비롯해서 단체전은 100여회에 이르고 있다. 작품으로는 한국적 정서가 살아 있다는 평을 듣는 《밀짚광배 예수》, 《밀대걸레 예수》,《황색 예수》, 《예루살렘 입성》등이 있다. 그밖에 두 권의 시집과 이콘(ICON)집, 그림읽기의 산문집을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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