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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 |
2017년 《보고 싶은 얼굴》에서 만나는 세 번째 얼굴 - 박승희
1972년 4월 12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아버지 박심배와 어머니 이양순 사이 1남 2녀 중 둘째딸로 태어나 무안군 무안읍에서 성장했다. 1987년 아버지와 선생님의 권유로 목포 정명여고에 입학하였다. 1학년 담임이었던 구신서 선생님은 전교조 교사로 공동체적인 삶의 방법을 배우자는 의도로 ‘더불어 살자’라는 급훈을 내걸고 학급을 운영했다. 이후 같은 학교 친구들과 구신서 선생님이 지도하고 있던 목포지역 고교생 YMCA 활동을 했다. 1989년 박승희가 고3이던 해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이 발족하였고 전체 66명의 교사 중 30명이 전교조에 가입한 정명여고에서도 교사들에 대한 부당한 징계가 있었다. ‘자주교육쟁취고등학생연합(이하, 자고연)’이 조직되고 정명여고에서도 박승희를 포함한 지도부가 꾸려졌다. 자고연을 중심으로 고교생들의 시내 진출이 있었고 몸싸움 과정에서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지만 위축되지 않았다. 하지만 18명의 전교조 가입 교사가 강제해직을 당했다. 대학입시 준비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학생들의 중간고사 시험거부가 있었다. 박승희는 시험을 보고 있는 학생들에게 “선생님들은 전교조에 가입해서 이렇게 탄압을 받고 있는데 우리는 시험을 치르고 지켜보고 있으면 되느냐”며 시험지를 찢고 나가버렸다.
박승희는 우여곡절을 딛고 전남대학교 가정대학 식품영양학과에 입학한다. 과대의원과 교지《용봉》 편집실 수습위원으로 활동했다.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고, 사회비판적인 글을 자주 썼다. 167cm의 큰 키에 짧은 커트머리의 박승희는 수줍음이 많고 섬세하며 그림그리기를 즐겼고 한지를 접어 친구들에게 편지 쓰는 것을 좋아했다. 건강한 삶은 자신의 생활공간을 깨끗이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라며 매일같이 편집실 청소를 도맡아 하기도 했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총학생회장 석방을 위한 구출 대회 중 백골단의 무차별적인 구타로 머리에 타박상을 입고 죽는다. 한 대학생이 정권의 폭력에 의해 죽었는데 학생들의 관심은 예전 같지 않았고, 박승희는 그 사건 때문에 많이 괴로워했다. 유서에 적힌 날짜로 보면 27일 분신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29일 아침, 어머니가 겨울신을 사 신으라고 쥐어주신 돈으로 총학생회장에게 줄 밝은색 넥타이와 편집실 후배에게 줄 초콜릿 등을 산다. 그리고 ‘강경대 살인만행 규탄 및 폭력정권, 살인정권 규탄 결의대회’에 참석했다. 이날 오후 3시 5분경, ‘2만 학우 단결, 미국 반대, 노태우정권 타도’를 외치며 제1학생회관 앞에서 분신했다. 박승희 열사는 그렇게 분신으로 자신의 뜻을 알리고 21일 간 병상 투쟁 후 5월 19일에 사망하였다. 장례는 7일장으로 하고 명칭은 ‘겨레의 딸 자주의 불꽃 고 박승희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정했다. 유서에 코스모스 씨를 남기고 “학우들이 잘 다니는 교정에 코스모스 씨를 뿌려 해마다 코스모스가 만발하게 해달라”고 했다. 박승희정신계승사업회는 열사의 모교 전남대 교정에서 학우들과 함께 추모문화제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매년 기일에 추모제를 지내면서 열사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 김경화 작가
경성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입체조형전공, 서울대학교 조소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해양대학교 외래강사, 부산 원도심 문화창작공간 ‘또따또가’ 입주작가, 부산문화예술교육연합회 운영위원, 40계단문화관 자문위원, 책방골목문화관 자문위원을 맡고 있으며, 지금까지 여섯 차례의 개인전과 세 차례의 2인전, 다수의 기획전 및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생활문화공동체에 관한 본인의 생각을 풀어내 보고자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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