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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 |
2017년 《보고 싶은 얼굴》에서 만나는 첫 번째 얼굴 - 이석규
스물 두 해의 짧은 생을 마친 이석규는 전북 남원 가난한 농가에서 다섯 살 위인 형과 남동생 사이에 둘째로 태어났다. 내성적이고 다소 자기 고집이 강했던 그는 고입시험을 치르러 가는 차 안에서 멀미가 심해 시험을 잘 치르지 못하는 바람에 고등학교 진학을 미뤄야 했다. 결국 중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에 있던 형의 권유로 광주 직업훈련원에 입학했다. 직업훈련원 졸업이 3월인 까닭에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게 되자 바로 산업현장에 뛰어들었다. 5년 근무하면 군 근무가 면제되는 방위산업체인 경남 거제 대우조선이 바로 그 곳이다. 대우조선 조립부 외업반에서 월 30만원의 임금으로 월 560~580시간을 일해야 하는 힘든 생활 속에서 그는 크게 두드러질 것 없는 평범한 용접공이었다. 아침 7시 10분 체조와 7시 30분 업무로 시작되는 격무 속에서도 고교 진학의 아쉬움을 마산 고등학교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공부로 달랬다.
유족들에게서 장례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위임받은 장례준비위원회는 노조 집행부와의 연석회의에서 “장례를 ‘전국 민주노동자 장’으로 하고, 장지는 망월동 묘역으로 하되 묘지를 구할 수 없을 때에는 모란공원으로 한다”고 합의했다. 그러나 8월 24일 유족대표와 회사 측이 돌연 장지를 남원의 선산으로, 장례를 가족장으로 치르자고 주장했다. 결국 장지로 향하는 영구 행렬에 공권력의 투입으로 시신은 남원 선산에 안장되었으며, 이곳에서 해마다 고 이석규 열사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우연히도 이한열과 같은 나이에 같은 사인으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이석규. 그의 삶과 정신은 앞으로도 노동 현장과 우리들 삶 속에 오롯이 살아있을 것이다.
# 나규환 작가
조소를 공부했다. 스승 구본주를 통해 사회를 보는 눈을 뜨게 되었다. 2006년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반대 운동 때부터 민중생존권 투쟁 현장에 달려가는 파견미술가이다. 지난 겨울 광화문 광장에 ‘박근혜, 이재용, 정몽구, 김기춘, 조윤선’ 조각을 세웠다. 빠른 시간에 형상을 만들어야 했기에 스티로폼을 깍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흙을 주무르고, 나무를 깍고, 철을 두드리며 현장과 작업실을 오가는 저는 조각가입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세월호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을까? 태극기집회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비정규직 문제는 왜 해결되지 않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모습이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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