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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보고 싶은 얼굴》에서 만나는 여섯 번째 얼굴 - 김영미
1961년 생.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소망했던 대로 교사가 되어 교단에 서지만 1985년 해직된다. 학교를 떠난 그가 선택한 곳은 경기도 군포시 산본. 그곳에 정착해 일생을 그곳에서 보내며 지역민들과 웃고 울고 투쟁한다. 산본 지역 최초로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노동상담을 했다. 생활밀착형 운동도 전개한다. 1989년 지역 주민들과 함께 폐식용유로 비누 만들기를 하면서 본격적 지역운동을 시작한다. 1992년에는 '주민이 주인이 되는 지방자치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군포시민의 모임을 결성한다.
우리나라에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995년이었다. 군포시민의 모임은 전방위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다른 시민단체들과 의정평가단을 구성해 시의원들의 시정질의를 분석해 지역신문에 발표하고, 지역 여론조사, 수돗물 불소화 사업 등을 펼치는 한편 '더 좋은 부모교실', '환경교실' 등을 통한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난시청 지역인 군포에서 최대 과제였던 TV 수신료 분리운동과 1996년부터 5년 간의 긴 싸움 끝에 이뤄낸 고교 평준화 등은 손꼽히는 성과들이다. 1996년 군포시로부터 '당동 청소년문화의 집'을 위탁받은 후로는 어린이, 청소년 운동까지 영역을 넓힌다. 1998년 치과의사 등 뜻있는 지역민들이 추렴한 돈 200만 원으로 전교조 군포지회와 함께 군포에서 처음으로 어린이날 행사를 열었다. 첫 해 3000명이 모인 '얘들아 놀자' 행사는 이후 최대 5만 명의 인원이 함께 즐기는 군포 최대의 행사로 자라나기도 했다. 티브로드 ABC방송 시청자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2002년에는 안양 지역 15개 여성 및 시민단체가 연대한 '안양군포의왕 여성정치참여연대'에서 상임대표를 맡는 등 여성의 시민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에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와 뜻과 일을 함께 했던 친구들은 김영미를 '불도저 같은 사람'이라고 칭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을 감화하고 설득해 결국 후원자로 이끌어내는 능력을 가진 이였다. 여성, 환경, 청소년, 언론 등 사회 전 분야를 아우르지 않은 분야가 없었고,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을 하든 많은 사람들을 몰고 다니고, 많은 사람을 돌보았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해내고, 많은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는 그에게 정치를 권하는 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정치는 안 한다. 시민모임이 얼마나 근사한가. 나는 국회의원보다 시민운동가로 남고 싶다." 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할 일 많았던 '군포의 어머니'는 난소암에 발목이 잡힌다. 투병 끝에 난소암은 치유했으나 암이 폐로 전이되어 결국 4년 투병 끝에 세상과 이별한다. 일생 그가 투신한 군포 지역의 시민들이 그를 보내는 자리에 함께 모였다. 안양 군포 의왕시 합동 시민사회장이 치러졌다.
김영미를 이한열기념관과 연결시켜 준 것은 그의 딸 홍자영이었다. 홍자영은 2015년도 이한열장학생이다. 그가 세상에 소개한 자신의 어머니는 이런 사람이었다. "4년 여의 투병기간 동안 어머니의 동료들은 기꺼이 어머니를 보살폈고 치료비를 모금했습니다. 저는 외할머니와 살게 되었는데 잠을 자는 시간 외는 거의 어머니의 동료 집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진로와 학습, 그리고 학비까지 도움을 받았습니다. 학비를 주신 분은 넉넉하지 않은 분이었는데 어머니께서 그분이 소속한 노동조합에서 싸우는 동안 많은 힘이 되어 주셨다며 저를 격려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왜 이렇게 열심히 시민운동을 하셨는지 그때 깨달았습니다. 어려워도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지를 느꼈습니다."
이한열기념관이 홍자영으로부터 김영미를 알게 되고, 그래서 전에 모신 뒤 처음으로 전시회에 손님들을 초대한 날, 수많은 그의 친구들이 기념관을 찾았다. 그가 시민운동을 하느라 딸 곁을 자주 비울 때 그랬던 것처럼, 그가 투병하던 기간에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그가 떠난 뒤에도 늘 그래왔던 것처럼 김영미의 친구들은 김영미 대신 그의 딸 홍자영의 '어머니들'이 되어주었다. 김영미는 홍자영만의 어미가 아니라 군포시민 모두의 어머니였고, 홍자영은 김영미만의 딸이 아니라 수많은 '김영미들'의 딸이었다.
# 이난 작가
연극영화학을 전공했다. 〈swing diary〉(1996), 〈7am, slowly :opposite page〉(2002), 〈기억의 환〉(2003) 등 실험적인 단편영화를 연출했고,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어 상영됐다. 〈여전히 아름다운지〉 (토이) 등 30여 곡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기도 했다. 2009년까지 패션, 광고 사진 작가로 활동했다. 2010년 아시아영화펀드(ACF) 후반작업 지원 작품에 선정되어 첫 번째 장편 〈평범한 날들〉을 연출했다. 2014년 두 번째 장편 〈비치하트애솔〉을 감독했다. 2012년부터 2년 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신작 독립영화를 소개하고 감독과 대담하는 〈솔까말:감독, 감독을 말하다〉를 진행했다. 2013년 옴니버스 영화 〈서울연애〉의 프로듀서를 맡았다. 개인 사진 전시로 2006년 갤러리 '테홈'에서 열린 〈BETWEEN, AMONG, DISTANCE〉와 2008년 갤러리 '미엘'에서 열린 〈DISTANCE〉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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