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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보고 싶은 얼굴》에서 만나는 네 번째 얼굴 - 김윤
1953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서강대 영문학과에 들어갔다. 병약하지만 섬세하면서도 강단 있는 여학생이었다. 대학시절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고(故) 장영희 서강대 교수는 생전 에 기고한 글에서 김윤을 이렇게 기억했다. "심장이 약했던 윤이와 나는 입학 때 나란히 신체검사에 불합격해 몇 번의 재검을 받으며 친해졌고 대학 1학년 내내 함께 다녔다. … 걸핏하면 휴교령이 내려지고 탱크가 학교 정문을 지키고 있던 시절, 그는 우리 시대의 잔다르크처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기 시작했고, 중앙정보부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걸핏하면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고 추억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국내외 반정부 인사와 학생들을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인민혁명당계 공산세력과 불순 용공세력이 결합한 반체제 세력'으로 몰아붙여 대거 검거, 투옥시킨 사건이다. 김윤은 이 사건에서 유일하게 구속된 여학생이었다. 오빠 김인범 님의 증언에 따르면 공권력은 '여성인 점을 감안해 반성문을 쓰면 석방해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구속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 때 수감 생활로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된다. 민청학련 사건에는 구속자가 워낙 많다보니 자연스레 구속자 가족들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석방투쟁을 벌이게 된다. '구속자가족협의회(구가협)'이 탄생한 것이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가 회장을, 김윤의 어머니 김한림 님이 총무를 맡는다. 어머니도 딸 못지않은 투사였다. 구속자 가족들의 농성을 이끄는 등 정권과 타협 없이 싸웠다. 김한림 님은 지금까지 '민주화운동의 대모'로 우리에게 각인된다.
1975년 2월 17일 김윤은 풀려난다. 서대문구치소에서 지학순 주교, 김찬국 교수, 당시 서울대생 이철 등에 이어 홍일점인 그가 마지막으로 나왔다. 머리를 한 갈래로 땋고 구가협 어머니들이 마련해준 연분홍 저고리에 빨간 치마 차림으로 감옥에서 나오는 그의 모습은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1976년 지하신문《자유서강》사건으로 또다시 1년간 옥살이를 한 그는 이듬해 석방된다. 1977년 창립된 가톨릭여성농민회(가여농)와 인연을 맺은 뒤에는 가여농 자료 제1집과 FAO(세계식량농업기구)의 교육보고서《장벽을 깨뜨리고》를 번역한다. 1979년 한국앰네스티위원회 간사를 맡아 일하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배후조종 혐의로 또다시 지명수배 된다. 이듬해 무혐의로 신분 회복이 되면서부터는 농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1981년 전북 순창군으로 이주해서 무공해 농사와 돼지 농장 운영 등을 하며 서울의 소비자들과 직거래를 시도하는가 하면 1985년 전북 지역 소몰이 시위, 1987년 삼양사 토지 소작농 투쟁 등에 참여한다. 여성농민 조직화와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전국여성농민조직활성화위원회 전북 대표로, 전국여성농민위원회 창립위원장으로 일하는 한편, 각 군 여성농민활동가들을 대상으로 강사개발 훈련을 주도하고 여성농민들을 위한 학습교재《위대한 어머니》를 펴낸다. 그의 관심은 여성농민뿐 아니라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으로도 확장된다. 1990년 전북 정읍군에서 농촌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좋은 책을 제공해주는 '샘골 책마을'의 문을 연 것이다. 어머니 김한림 님도 1986년부터 딸이 사는 마을로 내려와 손녀를 돌보며 샘골 책마을 간사를 맡았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김한림, 김윤 모녀는 각자 병마와 싸워야 했다.
1967년 자궁암을 앓았다가 극적으로 완치됐던 김한림 님은 1992년 위암 진단을 받고 이듬해 79세로 생을 마감한다. 어머니와 사별하기 직전인 1990년 말 인공판막 수술을 한 김윤은 1997년 말 뇌일혈로 또다시 쓰러진다. 고문 후유증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전신이 마비된 상태로도 방송통신대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허나 그 꿈 이루지 못한 채 2004년 2월 12일 세상을 뜬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장례는 전북여성단체 여성장으로 치러졌다. 그리고 여성 동지들의 손으로 평소 좋아하던 거창의 산에 뿌려졌다.
# 이서 작가
1975년 서울생이다. 한국에서 설치미술작가로 활동하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프랑스 파리 세르지 예술학교(Ecole Nationale Supérieure D'art Paris-Cergy)에서 미술학 석사 과정을 전공하고 졸업했다. 이후 파리에서 작가로 전시와 문화기획을 했고 2015년 13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오랜 시간의 프랑스 체류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문화와 인문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체류 이후 10여 년이 흐르고 서양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을 즈음 자신의 뿌리와 우리 문화에 대해 정작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을 절감하며 2015년 '귀가'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우리 문화의 기반이 되었을 지리, 종교, 역사, 전통에 관심을 갖고 그와 관련된 작업들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모든 예술의 근거와 기초가 일상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연장선에 있으며, 일상이 곧 예술적 활동의 시작이자 또한 거기서부터 확장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를 실천하고 있다. 시각예술분야 이외에도 일본의 전통무용 부토나 한국무용과 같은 무용, 작곡과 건반과 같은 음악 분야 작업을 겸하며 도자와 술을 빚고 있다. 이 모든 활동을 다시 하나로 통합한 작업을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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