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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보고 싶은 얼굴》에서 만나는 두 번째 얼굴 - 강민호
1966년 전북에서 태어나다. 동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5년 한신대 경영학과에 진학한다. 1986년, 그가 2학년 때 건국대학교에서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집회가 열린다. 당시 정권은 일부러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이건국대로 진입하는 것을 막지 않고 학내에 들어가게 한 뒤 출입문을 완전 봉쇄, 시위 학생 전원을 검거한다. 8,000명의 경찰 병력에 헬기 2대까지 동원된 대규모 토끼몰이식 진압이었다. 26개교 1,447명의 학생이 연행되고 그 중 1,288명이 구속된다. 헌정 사상 초유의 단일 사건 구속 기록이다. 강민호 역시 이 집회에서 구속된다. 감옥에 갇혔어도 신념이 흔들리는 것은 허용치 않으려 했던 그의 결연한 모습은 당시 그가 동생에게 보냈던 옥중 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기소가 결정됐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중략)한편으로는 눈앞이 캄캄하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느껴졌고 도대체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단다.(중략) 그러나 지금에는 이런 일이 오히려 중요한 계기가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중략) 이 고통이 모진 비바람이 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이 시간은 지난 날 나의 행위들을 철저히 비판하고 반성함으로써 좀 더 굳건하고 확실한 나를 만드는, 그리하여 역사 속에서 강민호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한 역사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집행유예로 석방된 후에도 과연 그는 감옥에서 결심한 것처럼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 다시 민주화 운동에 몸과 마음을 던진다.
1987년 12월 16일, 그해 여름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6월 항쟁의 결실로 쟁취해 낸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국민들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투·개표 과정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막기 위해 공정선거감시단을 꾸린다. 그리고 투표 종료 후 투표함을이송하는 과정에서 구로구 을 지역의 투표함이 봉함되어있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 부정선거가 의심되는 증거물이었다. 이를 규탄하는 시민들은 구로구청에 모여 농성을 시작하지만 대규모 경찰력 투입으로 무력 진압, 해산된다. 이때 그는 또다시 검거되어 실형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한다.
1988년 강민호는 특별사면으로 풀려난다 . 학교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그는 복학을 포기한다 . 학교 대신 노동 현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 그가 스스로 택한 삶의 흔적이 , 노동 현장 취업 전 자필로 남긴 이력서에 남아있다 . '태덕루 (중국집) 입사' '동원 당구장 입사' '건설 일용직' … . 1990년 3월 28일 그는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전선 생산업체 '대붕전선'에 입사한다 . 하지만 입사하고 고작 1주일 만인 4월 4일 새벽 1시 , 야간작업을 하던 중 사고가 일어난다 . 롤러에 남아있는 알루미늄 폐선을 치우기 위해 1.5m 되는 연선기라는 기계 사이 통로를 지나다가 메고 있던 폐선이 회전하는 연선기에 말리면서 몸이 따라 감겨들어간 것이다 . 그는 이 사고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절명한다 . 24년의 짧은 생이었다 . 헤겔 철학을 공부하고 , 천자문을독파할 계획을 세우고 , 일본어도 다시 배우고자 했던그의 젊은 꿈은 이렇게 접히고 , 육신은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
그의 사고는 그 자신이 작업 공정에 서툴러서 일어난 일이었다기보다 작업장의 안전시설 미비로 인해빚어졌다는 점에서 노동 생산 현장의 열악한 근로조건에 대한 많은 비판과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모교인 한신대에 그의 추모비가 세워졌고 , '강민호열사추모장학위원회'가 발족되어 매 학기 재학생 중에서 두 명의 장학생을 선발하고 있다 . 2001년 한신대는 그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 사후 11년 만의 늦은 졸업이었다. 그는 일찍 떠났으나 그가 가고자 했던 길을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신해 걷고 있다. 강민호의 아버지 강영철님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유가협)에서 총무 등을 맡아왔으며 어머니 김혜수 님과 같은 아픔을 지닌 유가족들과 함께 아들이 만들려했던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싸워오고 있다.
# 전진경 작가
동양화를 배우다. 미대를 다니다 제도권 미술교육의 길을 중도에 접고 현장 중심의 활동을 시작한다. 평택 대추리, 용산 철거민 농성장, 인천 대우자동차 투쟁 현장 등에서 함께 호흡하다 2014년 4월에는 직장폐쇄된 뒤 버려진 경기도 부평 콜트악기 공장에 들어가 작업실을 꾸민다. 부당 해고된 노동자들이 농성을 펼치는 곁에서 작업을 한다. "작가는 존재 자체가 중요하다. 작가는 현장에 있는 것이 중요하지 뭔가를 하는 것이 중요한 건 아니다." 는 믿음에서다. 용산 참사 희생자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김근태 전 의원의 영정 그림을 그렸고 <내가 멋진 걸 보여줄께>(2012년, 콜트공장) <가두어야 하는 나의 미친 귀염둥이>(2015년, On-air 갤러리) 등 개인전과 <뉴 컨템포러리>(2015년, 경기창작센터) 등 다수의 단체전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이 주최한 민족미술상 수상, 경기문화재단 전문예술창작발표지원 선정작가. 2012년 러시아 노마딕 레지던시, 2014년 경기창작센터 입주 작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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