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10시~17시
02) 325-7216
후원계좌(신한)
100-028-371614
(사)이한열기념
사업회
전시소개 |
2015 《보고 싶은 얼굴》에서 만나는 다섯 번째 얼굴 - 이지현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1968년 생. 임시직으로 학교 교사로 일하다 1998년 재능교육에 입사한다. 입사하고 그리 오래지 않아, 그는 투사가 되어야했다. 1999년 정규직 노동자 파업투쟁 때 지지발언을 했다가 해고당한다. 함께 해고된 9명의 교사 노동자들과 함께 재능교육 노동조합 발기인으로 나선다. 2000년 복직된다. 그러나 노동조합 활동은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2003년까지 노동조합 법규부장으로 활동한다. 노조의 리더로서도, 교사로서도 충실하고 열정적으로 산 소중한 몇 년이었다. 2007년 사측과 노조의 갈등이 다시 불거진다. 임금 삭감 등 재교섭 문제 때문이다. 노조는 혜화동 본사 앞에서 천막농성에 돌입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구사대에게 폭행을 당해 발가락에 금이 간다. 4주 진단이 나와 6개월 휴직신청을 한다. 다시 현장에 돌아오려 했지만 회사가 수업을 배정해주지 않았다. 2010년 병마가 찾아온다. 유방암 2기 선고. 그로부터 1년 6개월 간 투병한다. 의료보험 문제로 회사에 연락을 했다가 해고 상태임을 알게 된다. 해고통보도 없었는데. 어처구니 없었다. 2012년 운명한다. 품었던 꿈 미처 다 펼치지 못한, 45세 아까운 나이였다.
교사로, 투사로 사느라 성혼도 못한 처지, 외롭게 그는 떠났다.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이 거리에서 노숙농성을 하였으나 회사는 5년이 지나도록 이지현 선생님을 복직 대상자 명단을 올릴 수 없다고 했다. 2013년 2월 6일 재능교육 본사 바로 앞 혜화동 성당 종탑 꼭대기에서 여성조합원 2명이 고공농성을 시작하였다. 고공농성 202일, 거리농성 2076일 만에 이지현 선생님을 복직자 명단에 포함한 합의안에 합의를 하고 성당 종탑에서 내려왔다. 아이들을 유난히 좋아했던 그를 기억하고자 부모님은 그의 생명보험금으로 필리핀 아마땅 민도르섬 어린이들을 위한 해피드림 니쿠드 교회를 지었다.
# 장유진 작가
내가 태어난 마을은 동쪽 끝닿는 곳, 언제 나는 이곳에 와있다. 1988년 5월을 기억한다.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가 동요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집 앞 공터에 들어선 영구차에는 포르말린 냄새가 가득했다. 사글세 들어 살던 리라는 이제 아버지가 없다고 했다. 그때에도 가난은 가난을 몰고 다녔다, 그렇게 동무들이 하나 둘 멀리로 갔다. 아마도 한섬 앞바다의 모래밭이, 가새마을의 파도가 열아홉이 될 적까지 내 일상의 구할을 대신 견디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은갈치 비늘처럼 반짝이던 이른 봄 바다, 그 풍경을 등 뒤에 두고 온 그날부터, 한밤중에 잠이 깨면 나는 내가 그 해까지 살았던 고향의 이야기를 -뒷란 쪽으로 나있던 깊고 어두웠던 광과 그 안에서 썩어가고 있는 할머니의 베틀, 마당의 우물과 펌프, 웃 방 옆의 낮은 부엌, 검은 솥, 그리고 아이스크림 대신 처마 끝의 고드름을 따먹던 날들에 대해- 잊지 않으려고 기록했다.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졸업, 2015 동대학원 박사과정 재학중. <피어나다- 한여름밤의 꿈>전, 갤러리 각, 서울(2010년), Seoul Contemporary Art Star Festival, 예술의 전당, 서울(2012년). 대한민국미술인전, 갤러리인 갤럭시, 국회의사당, 서울(2015년) 등 다수의 개인전, 단체전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