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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 |
2015 《보고 싶은 얼굴》에서 만나는 두 번째 얼굴 - 김경숙
1958년 전남 광산군 출생. 8세 어린 나이에 부친이 별세하면서부터 가난을 경험한다. 홀어머니의 날품팔이로 가계가 간신히 이어졌다. 그도 초등학교 졸업 직전 누에고치 공장에 취직한다. 내 학업은 포기하더라도 동생만은 가르치리라, 성공시키리라. 그는 결심했다. 16살에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왔다. 한풍섬유, 태진산업 등 공장을 전전했다. “연속된 철야작업으로 2개월 간 끊임없이 코피를 흘리기도 했고, 3개월 치 봉급을 받지 못해 5원짜리 풀빵 30원 어치로 생계를 잇기도 했다.” 그가 남긴 고백이다.
76년 수출가발공장인 YH사에 입사했다. 노동조합에 가입, 적극적으로 활동을 했다. 그러나 이 회사도 1979년 폐업 공고를 예고했다. 노동조합과 회사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노조 상무집행위원이었던 그도 싸움의 최일선에 섰다. 조합원들의 농성 등 강력한 반발에 사측은 경영 정상화를 약속했다. 그러나 쉽사리 뒤집어진 약속이었다. 회사는 일방적으로 폐업공고를 냈다. 여성 노동자 200여 명이 마지막 수단으로 마포 신민당사를 찾아갔다. 8월9일의 일이었다.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이 투입돼 농성을 강제해산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노동자들은 결의를 나눴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모두 죽음으로 맞서겠다’고. 8월11일 새벽 2시, 소위 ‘101호 작전’이 개시되었다. 1000여 명의 기동경찰대가 투입되었다. 폭력적인 강제 연행이 이어졌다. 수많은 국회의원과 당원, 노동자들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김경숙 열사는 그 아수라장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동맥이 끊어진 채였다. 경찰은 자결이라고,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고 발뺌했다. 그러나 2008년 3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는 이 사건을 경찰에 의한 타살로 결론 내렸다.
# 성효숙 작가
1958년 부산 생. 조소와 예술심리치료를 전공했다. 홍익대 4학년 야외조각전에서 작품이 강제 철거 당했다. 84년 미술동인 두렁 활동, 85년 <20대 힘 전>의 탄압, 85년 노동만화 <봄을 찾는 사람들>이 판금 당했다. 97~99년 <동북아와 제3세계미술전>, 99년 제1회 <여성미술제>, 2003년 <아시아의 지금-근대화와 도시화>, 2012 <부산비엔날레> 등 전시와 여러 현장 미술작업을 했다. 4번의 개인전 중 2012년 콜트악기 공장에서 작품이 파손 당했다. 현재 예술치료사로 <약손을가진사람들>에서 노동, 환경, 치유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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