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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 |
2015 《보고 싶은 얼굴》에서 만나는 첫 번째 얼굴 - 하재완
1931년 경남 창녕군에서 났다. 소년 시절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대구공업중학교 재학시 남로당 산하 민주애국청년동맹 맹원이 되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6개월 복역했다. 학교는 단국대에 잠시 다니다 입대했다. 1957년 중사로 군복무를 마쳤다. 4.19혁명 이후 경북민주민족청년동맹과 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경북협의회 부위원장으로 일했다. 5.16 쿠데타 이후 수배령이 내려졌고 1963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후 3선개헌반대 투쟁(1969년)과 민주수호 대구경북 협의회(1971년)에도 참여했다. 독재 정권은 영구 집권을 목표한다. 유신이 선포되었다. 투사들은 줄줄이 잡혀간다.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발표되고,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다. 그해 5월 1일 하재완을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고 간 명분은 ‘인민혁명당 재건위원’ 사건이다. 끌려가고 세 달이 채 못 되어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판결을 받는다. 항소하나 기각된다. 다시 상고하나 대법원에서 사형을 확정 받는다. 다음날 새벽, 사형이 확정되고 고작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된다. 모두가 잠든 이른 시각, 재심 기회조차 빼앗긴 8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하재완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지 11개월만인 1975년 4월9일의 일이다. 세계법률가협회에서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 또는 ‘사법 살인’이라 칭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사회는 그를 오래 부정했다. 그를 모른다, 그가 왜 죽어야 했는지 모른다 했다. 1989년에야 비로소 공개적 추모행사를 가질 수 있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인혁당재건위 사건이 조작된 사건이라 발표한다. 2007년 재판부는 20여회 공판을 거쳐 8명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드디어 명예가 회복되고 해원되었다. 2014년 원래 묻히었던 대구 현대공원 묘역에서 이천 민주화운동 공원으로 이장되었다. 하재완의 수의에서 작은 종이 쪽지에 적힌 글이 발견되었다. “그 날의 강대국 수뇌들이 저희끼리 제멋대로 삼팔선을 긋지만 않았어도 오늘날 우리 겨레는 오늘의 불행을 겪지 않았고, 지금쯤 오붓한 살림의 자족을 누린다.”
# 이재삼 작가
이재삼은 1960년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동강줄기와 나무숲을 곁에 두고 성장했다. 국립강릉대 재학 시절에는 미술은 배우거나 가르쳐서 작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으며 홍익대 대학원 수료 후에는 미술계에도 정치판, 사회판이 존재하므로 이 울타리를 넘어서서 초연해야 됨을 깨닫는다. 30대 끝자락에 작가는 혼자 노는 법에 통달하는 사람, 그림을 통해서 철들어 가는 사람임을 마음속 깊이 품으면서 ‘현대(contemporary)가 원하는 그림이 아닌 현재(present)가 간과하고 있는 그림’으로 그리기의 지향점을 세운다. 이제 50줄이 넘어서서 나무의 사리인 목탄으로 달빛과 응달에 대한 그늘, 그리고 그림자를 추적하며 음을 예찬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현재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서 스스로에게 고용된 월급없는 직장인으로 작업하고 있다. 1988년부터 아트사이드갤러리, 이영미술관, 포스코미술관, 스페이스k 등에서 24회 기획초대 개인전을 열었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1주년기념 <정원>전, 크리스티 아시안 컨템포러리아트 등 400여 회의 국내외 단체전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이영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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