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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방송] 이경란 관장 "민주유공자 예우 법률 제정 필요…이한열 열사, 이웃 향해 사랑 간직했던 청년으로 기억 되길"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20-08-05 10:12:46 조회 : 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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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bbsi.co.kr/news/articleView.html?idxno=990705

 

 

■ 대담 : 이경란 이한열기념관장
■ 방송 : BBS 라디오 <박경수의 아침저널> (07:20~09:00)
■ 진행 : 박경수 BBS 보도국장

 

▷박경수: 이한열기념관 이경란 관장과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스튜디오에 직접 나오셨네요. 관장님, 안녕하세요. 

▶이경란: 네, 안녕하세요. 

▷박경수: 오늘이 뜻깊은 날이잖아요. 관장님께서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연세대 학생으로 재학 중이셨고 학생으로서 바라보는 당시의 상황은 좀 다를 것 같습니다. 

▶이경란: 1987년 시작은 굉장히 암담했죠. 왜냐하면 박종철의 고문 치사 사건으로 시작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그해가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해였는데 당시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을 간접적으로 뽑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간선제로든 국민들이 원하는 뜻이 제대로 반영이 안 되기 때문에 헌법을 바꾸자 개헌을 하자는 주장을 계속했는데 주장을 하면서도 사실 그게 이루어질 거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박경수: 그렇죠. 힘들었던 상황입니다. 4.13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호헌조치를 발표하고 아주 그냥 사회가 경직되고 공포스러운 상황을 몰고 갔는데 이한열 열사가 당시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친분은 있으셨나요? 

▶이경란: 아니요. 생전에 얼굴 한번 본 적 없어요. 그런데 제가 늘 한열이 한열이 그렇게 부르거든요. 학번으로는 제가 1년 선배인데 당시에 한열이가 쓰러지고 나서 매일같이 연세대학교에서는 한열이를 살려내라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했어요. 그러니까 한 달 내내 그렇게 한열이를 살려내라고 하다 보니 한열이가 사실은 당시 연세대학교 구성원들 모두의 한열이가 된 거죠. 그래서 제가 처음에 이한열 기념사업회를 시작할 때 한열이 한열이 그랬더니 저보다 약간 윗세대 분들은 거북해하세요. 고인을 너무 소홀히 부르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저로서는 그리고 저와 같이 일을 했던 친구들도 한열이를 이한열 열사라고 부를 수는 없었어요. 왜냐하면 열사라고 하면 굉장히 멀리 있는 어떤 분 같은데 저희 옆에서 호흡하고 저희 옆에서 같이 뛰고 우리가 매일 한열이를 살려내라고 했었던 그 한열이를 

▷박경수: 당시 구호가 한열이를 살려내자죠. 기억납니다. 

▶이경란: 그렇죠. 그렇게 해야 내 옆에 살아 있었던 한열이라고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박경수: 사실 영화 1987를 통해서 많은 분한테 알려졌어요. 고인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날이 33년 전 어제입니다. 당시 교내 시위에서 있었던 상황인데 관장님도 그 현장에 계셨던 거죠? 

▶이경란: 그렇죠. 

▷박경수: 어떠셨어요? 

▶이경란: 다른 때하고 다르게 그날 비폭력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보통 때는 학생들이 경찰들이 잡아가는 걸 막기 위해서 돌이나 화염병을 준비하는데 그날은 비폭력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보통의 시위에 학생들이 교문 앞에 가서 외치면 전경이 최루탄을 쏘고 하늘을 향해서 최루탄을 쏘면 학생들이 포물선을 그리면서 느끼게 떨어지기 때문에 뒷걸음질 쳐서 보면서 도망을 갈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처음부터 직격으로 사람을 향해서 최루탄을 쐈고요. 학생들이 어느 정도 도망을 가면 백골단이라고 부르는 하얀색 헬멧을 쓴 위아래 청재킷과 청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와서 잡아가는데 그날은 최루탄을 쏘면서 동시에 백골단도 들어오는 그런 상황이어서 학생들이 보면서 피하지 못하고 그렇게 뛰어가다 보니 뒤에서 오는 최루탄을 피할 수가 없었죠. 

▷박경수: 정말 안타까운 일이고요 다시 한번 생각을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지선 스님도 얘기하셨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출발이었다고 얘기를 하십니다. 고인도 광주에서 태어났잖아요.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 같아요. 

▶이경란: 한열이가 제일 마지막에 쓴 글이 87년 5월 18일에 쓴 글이에요. 거기에도 보면 자기가 광주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광주항쟁을 몰랐다는 것에 대해서 부끄럽다고 쓰고 있어요. 

▷박경수: 그 얘기로 다른 얘기가 필요 없을 정도네요. 다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어제 민갑룡 경찰청장이 유족들에게 사과를 했죠. 

▶이경란: 네, 33년 만에 늦은 사과였지만 반가운 일이기는 했죠. 그런데 사과가 말만의 사과가 아니라 실질적인 사과가 되려면 우리나라 민주항쟁에서 희생당하신 분들을 국가가 사회가 예우하는 것이 뒷받침되어서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한열 열사가 많은 분들이 유공자일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국가유공자가 아니에요. 민주화운동 관련자예요. 그래서 이와 관련해서 경찰청에서 할 일은 아니지만 국회에서 해야 될 일이지만 민주유공자를 예우하는 그런 법률 이런 것이 제정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경수: 이런 것들이 계기가 돼서 국회에서 논의가 시작돼야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 

▶이경란: 20년 동안 부모님들이 그 법안을 국회에 제출을 하셨어요, 2000년부터. 
그런데 20년 동안 단 한 번도 논의도 되지 않았거든요. 이번 21대 국회에서는 논의가 되고 실질적인 결과물이 나왔으면 합니다. 

▷박경수: 이한열 열사의 어머님이 오늘 정부포상을 받으시는 거잖아요. 

▶이경란: 네. 

▷박경수: 알려진 바로는 조금 전에 스님도 얘기를 하셨기 때문에 아무튼 그런 부분들이 다 토대가 됐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보고요. 어떠세요? 1987년의 인연으로 관장께서 이한열기념관을 맡아오고 계시는 것 같은데 운영이 그동안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이경란: 모든 시민사회단체가 운영이 쉽지 않죠. 후원금으로 운영을 하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떻게 하면 아낄까 이런 생각을 제일 먼저 하죠. 저희들의 능력을 키우려고 노력하기는 하지만 또 능력 안에서 그동안 일을 해 왔기 때문에 그렇게 무리스럽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기는 해요. 그러니까 저희가 장학금을 주기도 하고 전시를 하기도 하는데 처음에 후원금이 적을 때는 1명한테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고요. 

▷박경수: 마포에 있는 거죠? 

▶이경란: 네, 그래서 후원금이 조금 늘어나면서 장학생 수를 늘리기도 하고 그리고 전시도 제일 처음에는 저하고 친구하고 둘이 일을 시작했는데 저희가 직접 설치도 다 하고요 철거도 다 하고요 요즘에는 박물관으로 등록이 되면서 박물관의 전시지원을 통해서 지원금을 받으면서는 전문가들의 손길로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박경수: 요즘 코로나 때문에 기념관을 찾는 분들이 많지는 않을 것 같지만 과거에 오신 분들 중에 기억에 남고 인상 깊은 방문자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이경란: 저한테 가장 기억에 남는 방문객은 초등학교 1학년 친구예요. 그 친구가 후 박종철 이한열이라는 만화책이 있어요. 그런데 그 만화책을 읽고 부모님을 졸라서 가보고 싶다고 해서 왔대요. 그래서 그 친구가 가장 기억에 남고요. 또 저희 기념관에는 일본 분들이 굉장히 많이 오세요. 1년에 500명 정도 오시는데 그분들이 일본의 시민사회는 굉장히 미약한데 한국에서는 이런 시민사회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부러워하시죠. 

▷박경수: 일본 분들도 많이 오시는군요. 영화 1987 얘기를 좀더 해 보면 그걸 통해서 이한열 열사 하면 운동화가 생각난다고 얘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관장님께서 고인의 타이거 운동화입니다. 복원을 맡기셨다고요. 

▶이경란: 네, 2011년에 제가 출근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때 한열이 운동화 바닥이 절반 정도 이미 부서져 있었어요. 조금씩 계속 부서지더라고요. 

▷박경수: 오래되니까 

▶이경란: 네, 그게 고무라서 가만히 둬서 부서진대요. 그런데 바닥이 그렇게 부서질 때마다 한열이에 대한 기억 이런 것도 부서져나가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희가 한열이 옷하고 한열이가 쓴 이런 것들은 보존 처리를 했는데 운동화는 현대물이어서 오히려 보존기술이 없더라고요. 박물관에서. 
그래서 미술품 복원 전문가이신 김겸 박사님께서 복원을 해 주셨어요. 

▷박경수: 복원이 된 거네요. 

▶이경란: 네. 

▷박경수: 다행입니다. 시간이 짧아요. 벌써 얘기를 얼마 나누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다 돼 가는데 끝으로 어떤가요? 후대에 이한열 열사 고인이 어떻게 기억됐으면 좋겠다 생각하시는 게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경란: 한열이는 이웃을 사랑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성찰했던 청년이었다고 생각해요. 한열이 글 중에 광주항쟁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부끄럽다고 하면서 내가 재물이 되어 인간들이 소외당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게 하고 싶다고 쓴 것이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이웃을 사랑하겠다고 하고 자신이 그러하지 못했을 때는 부끄럽다고 했거든요. 자신을 향해서는 부끄러움을, 이웃을 향해서는 사랑을 간직했던 청년으로 기억했으면 합니다. 

▷박경수: 알겠습니다. 33주년을 맞는 60민주항쟁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얘기 잘 들었습니다. 

▶이경란: 네, 감사합니다. 

▷박경수: 이경란 이한열기념관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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