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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얼굴》전의 여섯 번째 얼굴 - 박기순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9-10-18 11:43:34 조회 :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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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윤정미 작품.jpg (1525K)

2019 《보고 싶은 얼굴》 展에서 만나는 여섯 번째 얼굴, 들불야학 강학 박기순 님입니다.

 

* 2019 《보고 싶은 얼굴》 展 텀블벅 후원 사이트 https://tumblbug.com/unforgettable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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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집회 현장에서 울려 퍼진 ‘임을 위한 행진곡’

 

2019년 6월 14일 홍콩 ‘범죄인 인도 법안’(일명 송환법)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중국어와 한국어로 불렀다. 그는 이 노래가 한국의 5·18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노래라며 영화 변호인’, ‘택시운전사’, ‘1987’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렇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4월 5·18민주화운동 때 산화한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한 노래극 ‘넋풀이-빛의 결혼식’에 삽입된 곡이다. 그 노래극에는 두 달 전 영혼결혼식을 올린 이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 결혼식의 신부는 박기순, 신랑은 윤상원이었다.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 같은 삶

 

박기순은 1957년 전남 보성에서 아버지 박도주, 어머니 선덕애의 3남 4녀 중 4녀(여섯째)로 태어났다.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전남대 사범대 국사교육과에서 공부했다. 학습팀을 꾸려 세미나를 하고 동일방직 사건을 알리는 전단을 살포하였다.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을 지지하는 시위를 주도하여 수배되고 도피 생활을 하였다. 있어야 할 곳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1978년 7월 노동운동의 토대를 강화하기 위해 ‘들불야학’을 창립했다. 야학에선 선생님을 강학이라고 불렀다. 가르치며 배우는 사람이란 뜻이다. 학생은 학강이라고 불렀다. 배우며 가르치는 사람이란 뜻이다. 성당 한 모퉁이에 마련한 야학, 그곳에 온기를 불어넣기 위해 12월 25일에도 학생들과 산에 땔감을 마련하려 다녀왔다. 다음날 새벽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과 이별한다.

 

죽어서도 여성의 자리는 좁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5·18민주화운동 때 산화한 분들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작곡된 노래라고 알고 있었다. 신랑이 윤상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신부 이름은 듣지 못했다.
이 신부를 올해 전시에서 모시기로 하고 인터넷을 뒤졌다. 어느 글에서는 신부가 이기순이라고 하고, 다른 글에서는 신랑이 박관현이라고 하기도 했다. 윤상원기념사업회에 전화를 했다. 신부 이름이 박기순이라는 것을 확인해주며 들불열사기념사업회를 알려줬다.
박기순을 만나기가 왜 이리 어려웠을까. 윤상원을 영혼결혼식의 신랑보다 5·18민주화운동의 대변인, 전남도청에서 끝까지 투쟁한 이로 기억한다. 박기순 역시 영혼결혼식의 신부만이 아니라 그의 삶으로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그의 삶을 돌아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들불야학 설립과 운영이다.

 

들불 7열사

 

그가 1978년 허망하게 스러지지 않고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겪었다면 어떤 역할을 했을까. 들불야학의 다른 강학들의 삶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들불야학과 5·18민주화운동 《투사회보》의 필경사였던 박용준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윤상원과 함께 5월 27일 진압군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25세)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활동으로 수배, 체포됐다. 광주교도소에서 단식농성 중 1982년 숨졌다. (30세) 들불야학의 학당가를 지은 신영일은 5·18민주화운동 이후 청년운동을 하다 1988년 병으로 타계하였다. (31세) 광주 광천동 일대에서 빈민운동을 벌이던 김영철은 1980년 5월 27일 체포돼 투옥됐다.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중 1998년 숨졌다. (51세) 연극으로 5·18민주화운동을 알렸던 박효선은 김영철 사후 한 달 뒤 유명을 달리하였다. (55세) 들불열사기념사업회는 이들을 함께 기리고 있다.

 

윤정미 작가가 〈박기순 님의 흔적을 따라서〉라는 12점의 사진으로 표현했다.

- 관장 이경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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