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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얼굴》전의 다섯 번째 얼굴 - 배주영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9-10-15 10:15:32 조회 :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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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보고 싶은 얼굴》 展에서 만나는 다섯 번째 얼굴, 전교조 해직교사 배주영 선생님입니다.

 

* 2019 《보고 싶은 얼굴》 展 텀블벅 후원 사이트 https://tumblbug.com/unforgettable2019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이했다. 1987년 전교조설립 이후 1,527명의 교사가 해고되었고, 120여명의 교사가 생을 마감했다. 처음으로 전교조장으로 장례를 치른 배주영 선생님을 기리는 2019년, 전교조는 여전히 법외노조다.

 

배주영은 1963년 7월 경북 달성에서 가난한 농가의 삼남 삼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성당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밝고 넉넉한 사람으로 자랐다. 운동과 글쓰기, 웅변 등 다양한 분야에 재능을 보여 학교는 물론 인근 군내의 행사장 연단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오빠 배설남은 막내의 재롱으로 온 식구가 잠시나마 고단한 삶의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하고, 언니 배미화는 방학을 지내러 온 언니의 동네 아이들과 금새 친구가 되던 인정 많고 재치있던 동생으로 배주영을 기억한다.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러운 사랑을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국민 학교를 다닐 때부터 교사가 되고 싶었던 배주영은 1985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 2월 경북 봉화여중·고에 부임하며 교사생활을 시작한다. 봉화여고에서 2년, 청송군 진보종합고등학교에서 2년 6개월을 재직하고 1989년 8월 5일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임되기까지 4년 6개월. 배주영 교사가 남긴 일기에는 학생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나는 그대들을 아끼고 사랑한다. 이쁜 아이들. 이쁘진 않지만 좋은 녀석들. 못난 놈들. 내 그대들에게 줄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줘야 하는 건 또 무언가. 그대들이 받고 싶은 것들은 무에요?(85년 11월)” 학생들에 대한 사랑이 많아 교사로서 기쁨이 컸고,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 학생들과의 관계맺기의 어려움으로 감정의 부침도 많았다. 그러나 ‘스승’으로 서기 위한 자기 고민은 놓치 않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생활에 의미를 두지 못하는 학생들 개개인의 상황을 들여다보고, 필요한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결석을 하거나 학업에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학생들에 대한 염려와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내용이 일기에 빼곡이 적혀 있다.

 

"오빠, 이 땅의 내일을 위해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여, 용기를 가집시다."

 

배주영은 1986년부터 변화하는 시대상황에서 요구받는 자기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다. “이 땅의 독재체제의 정체를 꿰뚫어 살피는 눈이 필요한 때. 상황 분석,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와의 대화, 여성의 한계 탈피. 빠른 시일 내로 조직의 일원이 되어야겠다(86년 11월 1일).”고 적고 있다. 고민의 글들 말미에는 이미 노동운동에 투신하고 있던 오빠 배설남을 자주 언급했다. 천주교 신자였던 점, 노동운동가로 살고 있던 오빠의 삶이 배주영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987년 배주영은 인문보통과 4반과 농업과 1반으로 구성된 진보종합고등학교로 근무지를 옮기고, 농과반 학생들에게 마음을 쏟았다. 87년 민주화항쟁의 열기는 청송의 배주영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6월 10일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간선제 유지를 재확인하며 노태우가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자, 이에 맞서 호헌규탄대회를 벌이던 시민 삼천 여명이 연행되고, 6월 28일 박종철 고문관련자들에 대한 처벌 수위에 분노한 국민들이 전국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일기에 자세히 적고 있다. 후일 배주영의 업무수첩에서 박종철이 구치소에서 누나에게 보낸 편지글을 타자기로 작성한 글도 발견되었다.

 

"살아 숨 쉬는 교육, 교육 민주화 위해 가자 교원노조의 깃발을 힘차게 휘날리자."

 

87년 6월 30일. “안동 학생회관에서 모임 하나를 소개받았다. 교사들의 모임. YMCA 중등교사협의회의 후신 정도. (중략) 매주 화요일은 안동행을 해야 한다. (중략) 장족의 발전이 있기를, 우리 모두에게”라고 쓰고 있다. 배주영은 오래도록 원했던 ‘조직’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88년, 안동교사협의회 동료교사들과 삼성택시 노조원들의 농성현장을 방문하고, 해직교사 복직촉구대회에 참여하고, 민주교육법쟁취대회에 참여했다. 학교에서는 동료 교사들이 대한교련 탈퇴의견을 밝혀 교장과 긴장관계가 형성되었고, 배주영 또한 교협활동을 이유로 교장의 호출을 받기도 했다. 88년 12월 10일, 90여명의 교사들이 모여 청송 · 영양 교사협의회를 창립했다. 배주영은 안동교사협의회의 부회장, 청송영양교협의 총무부장으로 활동했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먼 훗날 1989년 5월 14일과 28일 선생님은 어디에 있었느냐고 제자들이 물을 때, 교원 노조 발대식과 결성식에 참여했노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 우리들(1989년 5월 16일).” 배주영은 그 자리에 함께였고, 전교조를 탈퇴하지 않으면 교단을 떠나야 한다는 학교측의 압력에 맞서야 했다. 교장은 7월 5일 배주영을 불러 면담을 진행하고, 교사들에게 “본인은 교원노조에 가입한 적이 없으며, 이후에도 가입하지 않을 것을 확약합니다.”는 확약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한다. 배주영은 교장과의 면담과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기록과 함께 확약서를 일기장에 넣어 두었다.

 

"따뜻하게! 굳건하게! 치밀하게!"

 

배주영은 전교조 탈퇴를 거부했고, 학생들은 배주영에 대한 학교측의 징계절차 돌입에 항의하며 수업을 거부했다. “우리 반이 처음 시작하여 전체로 확대되어가는 듯한 수업 거부. 오늘 종례 때 내 입장과 생각을 분명히 밝혔으니 내일은 더 확실하게 해나갈 테지. 앞 날,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두려움들, 숨이 가쁘고 손끝이 떨려 글씨조차 쓸 수 없는 지경에서 한 마디만 하면, 곧 눈물이 솟구칠 것 같던 7교시(1989년 7월 19일).”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 했지만, 배주영은 교단에 설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두려웠다. 결국 8월 5일 배주영은 ‘해임’되었다.

 

1990년 2월 3일.“선생님, 그래 교단에서 서고 싶다. 너희들도 보고 싶다. 같이 떠들고, 웃고..... 지금은 가장 올바른 인간의 모습을 다듬는 시간이다. 사랑을 배우고 깨우치는 시간이다. 선생으로서의 모든 자질을 갖추는 단련의 시간이다.”라는 말과 함께 마흔 네 명 학생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으로 일기는 끝이 난다. 배주영은 전교조 상근자로 활동을 이어가다, 1990년 2월 19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삶을 마감한다. 제자들과 졸업식 때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로 한 날이었다.

 

이윤엽작가가 배주영 선생님을 채색판화로 그렸다.

                                                                                       -이한열기념관 교육사 이은영

 

 

첨부파일   * [크기변환]배주영선생님.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