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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얼굴》전의 네 번째 얼굴 - 조지송 |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9-10-11 14:13:17 조회 : 1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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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송 목사님은 영등포산업선교회를 20년간 이끌어가신 한국노동운동의 선구자이십니다. 올해 초에 돌아가셨지요. 보고 싶은 얼굴전에 모셨습니다. 이분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바보들의 행진 조지송 (1933.8.28. – 2019.1.22.) 영등포산업선교회 초대 총무, 목사
“나는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는 데 유일한 방법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노동조합을 노동자들의 교회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인간의 권리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민주주의를 배우고, 이웃사랑을 배우고, 희생과 봉사를 배우고,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우며,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것도 실천적으로 배우고, 참 평화가 무엇인지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지송 목사는 1933년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다. 61년 장로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63년 예장통합 경기노회에서 한국교회 최초 산업전도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초대 총무를 맡아 20년간 현장에서 헌신했다. 특히 박정희정권의 탄압에 맞서며 천주교의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JOC)와 더불어 한국노동운동의 초석을 다진 선구자로 꼽힌다.
조지송 목사가 활동했던 1970년대는 한국 근현대사의 암울한 시기였다. 이제 막 노동조합들이 생겨나고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교육을 해왔는데 그 첫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유신’, ‘긴급조치’ 등이 발표되었다. 정부는 노동운동 및 영등포산업선교회의 활동을 ‘빨갱이’로 치부하며 누명을 씌우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산업선교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노조 간부들은 숨어버렸고, 교회조차도 ‘신앙이 없는 집단’이라하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 산업선교회를 지켰던 이들은 조지송 목사와 함께 했던 어린 여공들이었다. 그들에게 조지송 목사는 아버지와도 같았다. 조지송 목사는 이들의 모습을 ‘바보들의 행진’이라 표현했다.
조지송 목사는 50세가 되던 1982년경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산업선교 현장을 떠났다. 1985년부터 충북 청원군 옥화리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그는 자신이 만약에 북쪽에서 내려오지 않고 살았더라면 아마도 예술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옥화리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동료들에게 손수 만든 카드를 보내주곤 했다. 도시산업선교 활동을 하던 많은 노동자들이 조지송 목사의 집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며 위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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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보고싶은얼굴_웹베너_모바일_1200x753px.pdf_page_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