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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얼굴》전의 두 번째 얼굴 - 이옥순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9-10-08 22:06:37 조회 : 1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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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보고 싶은 얼굴》 展의 두 번째 순서, 오늘은 이옥순 님입니다.

 

그는 자기 삶의 철저한 ‘주인’이고자 했다.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삶을 위해 온몸을 던졌다. 농성도, 투옥도, 수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음까지 각오하고 유서를 남겼다. 그가 남긴 책 제목《나 이제 주인 되어》처럼, 그는 끝까지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았다. 이옥순. 누군가는 그를 80년대 노동운동의 기폭제가 된 원풍모방 노동조합 농성의 주역으로 기억한다. 누군가는 3년 4개월의 수배생활을 버티며 노동운동계의 전설로 남은 서울노동운동연합 위원장으로 기억한다. 누군가에게는 그가 독보적 여성 통일운동가로 남아있을 것이다.

 

1954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나고 자란 ‘농촌 소녀’ 이옥순이 상경하여 임금노동자가 되기까지는 우리가 흔히 아는 사연을 그대로 따른다. 여고를 다니던 중 가세가 기울고, 동생들 등록금이라도 보태기 위해 서울로 향하고, 봉제공장과 색연필 공장 등 영세한 공장에서 힘겹게 일한다. 그러던 중 대단위 사업장인 원풍모방에 들어가게 되고, 그때가 그의 나이 스무살이었다. 원풍모방 입사는 그가 노동운동가로 거듭 난 계기가 된다. 당시 원풍모방 노동조합은 노동운동 일선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노조다. 리더십과 활동력을 타고난 이옥순에게 노동조합 활동은 사회 정의를 깨우치고, 동지들에 대한 사랑을 사무치게 새기는 삶의 터전이 된다.

 

1980년에 들어선 신군부는 노조 활동의 선두에 선 원풍모방 노조를 두려워했다. 싹을 밟아야 했다. 1982년 그가 원풍노조의 총무가 되었을 때, 노조와 공권력과의 갈등은 바늘 끝처럼 날이 선다. 그는 앞으로 펼쳐질 싸움이 만만찮음을 느끼고 부모님께 유서와도 같은 편지를 남긴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원풍노동조합의 문제가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략) 우리는 더 이상 물러날 수도 없고 양보할 수도 없는 곳까지 밀려왔습니다. 저는 내일 일도 알 수 없는 입장에서 조합 일을 하고 있기에 혹 언제 어떤 식으로 죽게 될지 몰라 미리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딸은 결코 비겁자가 되지는 않겠습니다.” 우발적으로 보이는 다툼이 집단 폭력의 빌미가 되어 공권력이 노동자들의 농성 현장을 치고 들어왔다. 조합원들이 사업장에서 쫓겨나고 600명이 해고되었다. 이옥순은 구속되었다.

 

1983년 출옥하여 인쇄공장에 취업했으나 경찰의 방해로 우여곡절 끝에 해고된다. 이때부터 그는 사업장 중심 노조활동보다 광범위한 단위의 노동운동으로 시야를 넓혀 고민하기 시작한다. 뜻 맞는 사람들과 모여 새로운 노동운동 전망을 열기 위해 85년 1월 민한당사 점거 농성투쟁을 벌인다. 그는 이제 노동운동계의 대표적 인물로 떠오르게 된다. 1985년 결성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의 부위원장에서 위원장이 되고 곧 수배령이 내려져 도피생활을 시작한다. 500만원의 현상금이 붙은 채 3년 여 도망 다닌다. 그가 경찰에 잡히지 않고 꾸준히 활동하는 것 자체가 곧 서노련의 희망이 된다.

 

1989년 초 수배가 해제된다. 그리고 그때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나 이제 주인 되어》를 펴낸다. 이 책은 후배 노동운동가들의 필독서가 된다. 그리고 이 즈음 그는 서서히 통일운동에 눈을 돌리게 된다. 주변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석방 장기수들이 공동 생활을 하는 ‘나눔의 집’으로 봉사를 나가면서부터다. 그리고 이 곳에서 평생의 반려가 될 권낙기선생을 만난다. 권낙기선생은 이른바 ‘경상도 간첩단 사건’이라 불린 ’제2통일혁명단 사건‘에 연루되어 18년 간 형을 살다 1989년 출소했다. 서른 일곱 살 이옥순은 여섯 살 연상의 권낙기선생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된다. 두 사람은 1991년 결혼한다. 통일운동가의 아내로, 다정과 다인 두 딸의 엄마로,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먹고살기 미안해’ 학습지 교사 등으로 분주하게 살면서도 그는 사회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1999년에는 70년대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이들을 모아 <70년대민주노동자모임>을 조직해서 초대 사무국장으로 일한다. 2000년 장기수 어르신들을 돌보고 비전향장기수 석방운동을 벌이는 여성 평화단체 <금강초롱>을 만들어 초대 회장이 되기도 한다. 이런 삶에 병마가 치고 들어온다. 2000년 그는 폐암 판정을 받는다. 병과 싸우면서도 그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대외협력위원장 전국연합 대표로 조선노동당 창당 55돌 행사에 참석하는 등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2001년 2월 20일 그의 병이 턱 끝까지 올라와 그를 위협할 즈음 원풍모방 노조운동이 정부로부터 민주화운동으로 공인받는다. 그리고 그 날이 오기만 기다리며 버티었다는 듯 사흘 뒤 운명한다. 그의 나이 마흔 여덟. 어린 딸 다정과 다인은 열 살, 여덟 살이었다.

그의 딸 다정씨는 어머니의 삶을 “불꽃 같았다.”고 이야기한다. “엄마의 흔적을 되짚어 가다보면 열기가 느껴진다.”고 했다. 그 열기는 그가 가고 18년이 되도록 식지 않고 있다. 엄마처럼 주인이 되어 살기 위해, 불꽃처럼 살기 위해, 이제 그의 딸이 청년운동·평화운동을 펼치고 있다. 사람은 갔어도 정신은 이렇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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