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기념사업회 소식지 <한열사랑> 2019년 6월호의 ‘만남’ 난을 위해 연세대 재학생 추모기획단장 권순창 님을 인터뷰했습니다. 소식지 안에 미처 다 담지 못한 인터뷰 내용을 홈페이지에 전재합니다.
-이한열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학교측 실무 주체는 ‘경영대학’인데 비해, 추모기획단은 ‘상경경영대학’이라는 다소 낯선 이름입니다.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연세대 상경대학과 경영대학은 현재 두 개의 단과대학으로 분리되었으나 오랜 기간 하나의 단과대 아래 있었고, 동문회 역시 아직 분리되지 않았기에 아직도 상경경영대라는 이름으로 여러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단과대의 학생회장단 역시 하나로 선출하고 있고, 저 역시 이한열 선배를 추모하는 행사에 ‘상경경영대 후배’로서 추모 기획단의 단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한열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이 언제였는지요.
“아마 중학생 때였을 겁니다. 역사 시간에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대해 배우면서 얼핏 봤던 것 같아요. 박종철 열사가 어떻고, 이한열 열사가 어떻고... 별 생각없이 넘겼는데, 제가 이한열 열사의 후배가 돼 추모 기획단장까지 맡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사실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 시절에도 별 생각은 없었어요. 개강 전 단과대별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이한열 열사가 우리 단과대 소속 경영학과 87학번이었다고 들었을 때도 ‘아, 그렇구나’하는 정도였지요.”
-그런 이한열이 권순창 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영화 <1987>을 봤을 때에서야 이한열 열사가 제게 비로소 확 다가왔습니다. 아직 날짜도 기억납니다. 2017년 12월 31일에서 2018년 1월 1일로 넘어가는 밤이었습니다. 새해라고 친구들과 모여 건국대 앞에서 술을 마시다 영화관에 들어갔죠. 연세대 후배의 입장에서 정문 앞 시위 현장을 보고, 이한열 열사를 보는 것은 중학생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부모님도 민주화운동을 하셨기에 영화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예, 저희 부모님도 이한열 열사와 비슷한 세대고, 학생 운동에 몸을 담았다고 합니다. 두 분 모두 민주화운동 관련자이시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건국대 사태로 구속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와 관련된 건국대 바로 앞 영화관에서 술을 진탕 먹고는 1987을 관람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습니다(웃음).”
-이한열추모제를 맡아 치러야 한다는 데 혹시나 부담감을 느꼈을 수 있었을 것같습니다.
“부담감은 있었습니다. 학교의 공식행사로 진행된 점도 있었고요. 대학생이 부총장님, 학장님과 한 자리에서 회의하며 얘기를 나눈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또 작년에는 별탈없이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친 것 같아 괜히 제가 실패 사례를 남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마음은 편해졌습니다. 하늘에 계신 이한열 열사가 우리의 실수를 보면 그저 웃으실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요? 수없이 많은 실수를 했지만 별다른 자괴감에 빠지지 않고 기획단원들과 웃어넘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준비 과정에서 특별히 목표로 한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이한열 열사를 역사책에서나 나오는 딱딱한 인물이 아닌, 우리의 선배, 우리의 친구, 누군가의 아들로 느껴지게끔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한 몸 불사른 영웅’이라기보다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대학생이었음을 강조하고 싶었지요. 학생들이 이한열 열사를 가깝게 대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단과대별 분향소 운영을 간소화하고, SNS와 방명록을 통해 추모의 글을 남기는 등 학생들이 편히 접근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했습니다. 사진전 전시와 <1987> 상영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이었습니다.”
-실제 추모제를 치르며 힘들었던 점도 있어지요?
“몸과 정신이 고됐습니다. 특히 시도 때도 없이 오는 전화들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경영대 행정팀장님, 학생지원팀장님, 백양누리 담당자 선생님, 이경란 관장님,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추모제 공연팀들, 기수단, 연세춘추, 여러 언론사들까지... 아침부터 쏟아지는 전화를 받고, 또 누군가에게 전화하고, 다시 누군가에게 전화가 오고... 2주 정도를 그렇게 지냈습니다. 건망증 환자처럼 누구와 어떻게 얘기가 됐었는지 잊어버려 다시 전화를 걸었던 적도 많습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다는 느낌이 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부학생회장 본연의 업무도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요. 다 제 역량 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추모제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두 발 뻗고 푹 잘 수 있었습니다.”
-추모제를 겪으며 새로 깨닫거나 느낀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배은심 여사님을 만났을 때 이한열 열사도 누군가의 친구였고, 선배였고, 아들이었다는 것을 새롭게 느꼈습니다. 열사라는 이름에 가려져 있던 평범한 청년의 모습들을 여사님을 통해 알게 되었고, 저희 어머니 생각도 많이 났습니다. 코끝이 찡했습니다. 대학생들은 지금 여름방학에 뭘 할지, 어디로 놀러갈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열사께서도 비슷한 고민을 하셨겠지요. 제가 지금 22살입니다. 1987년 이한열 열사의 나이와 같은데, 친구에게 빚진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여러 생각이 많이 나게 만드는 기획단 활동이었습니다.”
-준비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겠지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요청해 6월 4일부터 3일간 ‘6월 민주항쟁사’를 주제로 중앙도서관 앞 통로에서 사진전을 전시했습니다. 비가 온다는 예보도 있었고, 관리도 쉽지 않다는 경고도 있었지만 무조건 학생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 설치해야한다는 요구를 관철시켰죠.
이 사진전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일이 육체적으로 제일 힘들었습니다. 아침부터 20kg짜리 모래주머니 수십 개를 날랐고, 비가 오니 부랴부랴 비닐을 구해 온 몸을 적셔가며 전시물을 덮었습니다. 밤에는 비바람에 전시물이 혹시라도 쓰러질까봐 도서관에서 노심초사했고, 12시가 넘은 시간에 쓰러진 전시물을 세운다고 혼자서 낑낑댔던 기억도 있습니다. 기획단원들에게 고마웠습니다. 모래주머니도 함께 나르고, 비가 오니 비닐 씌워야 한다고 급히 불렀을 때도 와서 도와주고...
다행히도 저희가 준비한 여러 프로그램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기말고사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발길을 멈추고 사진전을 관람하던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꼈습니다. 힘들었던 만큼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전 설치를 위해 트럭 뒤에 타서 백양로를 카퍼레이드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떤 연세대 학생이 백양로 한가운데를 차타고 지나가 보겠어요?(웃음)”
-앞으로 어떤 진로를 꿈꾸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회에 나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요?
“고민이 많은 시기입니다. 신입생 때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면, 요새는 여러 제약으로 인해 하고 싶은 게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휴학을 하고 도서관에서 책도 읽으며 내 진로를 찾고 싶었지만 여러 일들로 바빠 그럴 새가 없어 아쉽습니다. 학생회와 기획단 등의 일들도 결과적으로는 제 진로에 많은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국가와 사회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큰 목표를 가지고 진로를 찾고 싶습니다.”
-이한열기념사업회나 사회 선배들에게 제안하고 싶은 점, 이야기하고 싶은 바가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이한열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학교에 들어서고, 이한열 열사 추모제가 학교 공식 행사로 진행되는 만큼, 학생들이 꾸리는 이한열 열사 추모 기획단이 한시적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아닌 자치 단체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떠한 연속성도 없이 추모제가 진행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더 풍성하고 잘 짜여진 행사가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급한 건 당연히 재정적인 문제겠지요(웃음). 기획단이 자치 단체로 남아 활동할 수 있는 예산만 확보된다면 그 시작을 제가 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여러 재야 단체 관계자 분들, 이한열기념사업회, 경영대 선배님들! 많은 관심과 지원을 허심탄회하게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