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이한열 열사의 어머님 배은심 어머님을 뵙고 여러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사단법인화는 이한열의 장례를 치르러 광주로 향할 때부터 생각해 온 일이지요. 20여 년만에 드디어 그 일을 이뤄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이제 아들을 진짜 내 품에서 세상으로 완전히 내보낸 것 같아 아쉬운 느낌도 듭디다.” 어머님은 이한열기념사업회의 법인 출범의 감회를 이렇게 털어놓으십니다. 말씀하신 바대로 어머님은 아주 오래 전부터 기념사업회의 법인화를 생각해 오셨습니다. “앞으로 세월이 지나 87년을 기억하는 이들이 점차 줄어든다 해도 누군가 그 때를, 그리고 이한열을 잊지 않고 그 뜻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랐어요. 기념사업회를 사단법인으로 만든 것은 그 때문이지요.” 사단법인이 출범하기까지 손길을 보태준 분들 모두가 고마울 뿐이라 하시네요. 자발적으로 장학회를 만든 사람들도, 이후 후원 회원이 되어주신 모든 분들도, 법인화 작업의 수고로움을 맡아준 분들도. 하지만 어머님은 “법인 설립은 시작일 뿐, 앞으로 어떻게 운영해 나가는가가 더 중요한 일”이라며 회원님들께 당부와 격려를 잊지 않으십니다. 법인이 제대로, 올바로 활용되어 세상에 보탬이 되지 않으면 설립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정작 어머님은 이한열기념관을 자주 찾으시지 않으십니다. 1년에 두 세 번이 고작입니다. 때로 지독히 아들이 그리워질 때면 기념관이라도 한 번 다녀오고 싶지만, 돌아서 나올 때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어머님이 주로 머무시는 곳은 광주의 집도, 서울의 따님 댁도 아닌 서울 동대문에 위치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어른들의 터전 ‘한울삶 입니다. 현재 어머님은 이 단체 회장도 맡고 계십니다. 말씀 나누는 자리에는 마침 전태일 열사의 어머님이신 이소선 어머님도 함께 하셨지요. 옆에서 종종 아이구, 엄마(이소선 어머님은 배은심 어머님을 이렇게 부르십니다)가 애많이 썼지 라고 도움말도 넣어주시곤 했습니다. 배은심 어머님은 어머니(이소선 어머님)가 베테랑이시지요. 우리야 뭐 병아리고 라 화답하십니다. 두 분은 연세가 10년 차. 20여 년 투쟁 동지 로 동고동락해오신, 가족 같은 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올해 일흔 두 세인 어머님은 그간 ‘아들을 대신해’ 전국의 민주화운동 현장을 발로 뛰셨지요. 집회장에서 ‘이한열 어머니’로 불리는 것이, 그렇게 아들 이름이 한번이라도 더 불리는 것이 당신의 보람이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다른 자식들에게 참 미안해요. ‘너희는 스스로 잘 살 수 있지만 말 못하는 한열이는 누가 챙기겠냐. 나는 앞으로 한열이하고 살란다’며 자식들 엄마 노릇보다 현장을 찾아다니느라 바빴지요. 그래도 불평이나 원망없이 이해해 준 가족들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지 못했어요.” 요즘은 민주화 운동이 소강상태라 집회나 행사장에 나가시는 일이 예전처럼 많지 않다 하십니다. 전에는 하도 현장으로 뛰어다녀서 검게 탔던 내 얼굴이 요즘은 많이 하얗게 되었다니깐. 막힘없이 조리있게 하시는 말씀에 유머도 잊지 않는 어머님이십니다. 이렇게 긴 세월 현장을 뛰어오신 때문일까요. 무릎 관절이 안 좋으십니다. 최근 가슴이 조이듯 한 답답함을 종종 느끼셔 병원검진도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4월말에 잡아놓았던 병원 예약을 다른 행사 때문에 또 연기하셨다니 걱정입니다. 어머님의 건강을 회원님 모두가 기원해주세요. 그리고 동대문 근처를 지나실 일 있는 회원님들은 한울삶 에 들러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는지요. 배은심 어머님과 이소선 어머님을 비롯해 이 곳을 내 집 삼아 어울리며 힘을 나누시는 유가협 어머님, 아버님들을 뵐 수 있으니까요. 전화 (02)3672-7798 홈페이지 http://blog.naver.com/pppbbbggg 찾아가시는 길; 지하철 동대문 역(1, 4호선)에서 하차, 1번 출구--> 제일저축은행을 오른쪽으로 끼고 창신동 골목으로 진입--> 100미터 전진하면 왼편으로 녹십자 약국 --> 약국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10미터 전방에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라는 작은 안내판--> 안내판이 가리키는 편(골목 진행방향에서 오른쪽) 골목 끝 한울삶 이라는 현판이 붙은 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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