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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학기 이한열 장학금 수여 학생, 그 첫 번재 글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2-08-24 00:00:00 조회 : 2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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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한열 열사의 정신을 오늘날 학생들에게 전하기 위해 진행하는 이한열 장학금 관련 수여 학생 글 입니다! 개인적인 신상은 공개하지 않기 위해서, 신청서에서 신분이 드러나는 글은 제외하였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아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도 열심히 살아보아용~>< 1. 이한열 장학회의 선발 기준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하신 분의 가족, 사회적 약자, 깨어있는 시민, 사회적 기업에 대한 구상이 있는 자입니다. 자신에게 해당하는 부분을 적어 주십시오. 하나 이상 해당 하는 경우 모두 적어 주십시오. 저는 깨어있는 시민의 기준에서 이한열 장학회에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많은 불평등들과 부조리들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고, 사회적 문제들을 바꾸어가기 위한 실천을 하는데 대학생활의 많은 시간들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학내에 제기되는 등록금의 문제, 청소노동자들의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한편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첨예하게 논의되고 있는 비정규직이나 정리해고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해고노동자들의 싸움에도 연대하는 학생으로서 함께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노동자, 노숙투쟁을 진행하고 있는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노동자, 기륭전자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싸움에 연대하는 실천들을 해왔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사회에서 점차 수가 늘어가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국에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는 제 3세계 국가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에서 겪는 대우라고는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그 이하의 대우일 뿐이었습니다. 언제나 강제추방의 위기에 놓인 채로, 산업재해를 당해도, 부당해고, 임금체불을 당해도 어디서 제대로 호소할 수 없는 위치에 놓여있는 사람들이 이주노동자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문제들을 조금이나마 해결하면서,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주노동자한글교실은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줌으로써 그/녀들이 한국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들의 권리를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돕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주노동자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알 수 있도록 최저임금, 산업재해와 관련한 노동법의 일부를 가르치는 활동을 또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주노동자들을 직접 만나서 활동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주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들을 대하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도 바뀔 수 있을 때, 이주노동자들이 진정으로 한국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를 다문화사회라고 이야기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가 다문화사회로 넘어가기에는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이주민에 대한 낯선 시선들과 편견, 그리고 때때로 이들에 대한 맹목적인 공격들이 이루어지는 한국 사회에는 인종주의가 뿌리깊게 남아있습니다. 이런 인종주의에서 한국인들이 벗어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피부색, 언어, 인종을 넘어서 인류애적 차원에서 모두가 자기 권리를 온전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주노동자한글교실 활동에서 학교 내에 있는 학우들을 대상으로 이주민에 대한 편견을 넘어서는, 이주노동자들과 한국 사회에서 공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알리고, 그 필요성을 촉구하는 활동들을 기획하고 실천해왔습니다. 포럼도 진행하고 학교 내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홍보도 진행했습니다. 이렇게 학우들이 저와 이주노동자한글교실의 활동을 통해서 조금씩 바뀌어갈 때 우리 사회도 다문화사회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깨어있는 사람이란 사회를 조금씩 바꾸어가는 주체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스스로를 온전히 주체적인 위치에 놓인 사람으로 자칭하는 것은 오만한 일이겠습니다마는, 그럼에도 제 스스로는 깨어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주체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들에서 이한열 장학회에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2. 이한열 열사, 또는 6월항쟁에 대해 아는 대로 기술하십시오.   박정희 정권의 장기독재는 경제개발과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명분을 앞세우면서 419혁명 이후 계속되었던 민주사회를 향한 민중들의 열망을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0.26 사건이 벌어지면서 한동안의 군부독재 체제의 혼란기가 형성되었고, 그 틈을 통해 수많은 대한민국의 민중들이 독재정권에 대한 거부와 민주사회에 대한 갈망을 분출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갈망의 분출이 1980년 518 민주항쟁과 1987년 6월항쟁이었습니다.   유신 정권 이후 들어선 전두환 정권 또한 군부를 동원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정권에 반대하는 518 민주항쟁을 참혹하게 진압하면서, 체제의 안정성을 구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한민국의 민중들이 1980년에 경험했던 해방의 경험은 강한 폭발력을 가지며, 비가역적인 민주주의 사회로의 변화를 이끌어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1987년 6월항쟁입니다. 전두환 정권이 잘못된 헌법을 옹호하는 호헌 조치를 통해, 민중들이 원했던 직선제로의 전환을 거부하자, 수많은 한국의 민중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민중들의 정치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민중들의 힘에 정권은 군부를 앞세우면서 진압하려했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6월 항쟁은 1987년 대선에서 직선제로의 전환을 만들어냈고, 대한민국의 정치적 민주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이한열 열사는 이 1987년 직선제 쟁취를 위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활동가였습니다. 연세대 총학생회에 있으면서, 전두환 독재정권에 반대하며 민주화를 외치는 민중들의 대오에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이한열 열사는 거리에서 대한민국의 변화를 이루기 위한 움직임을 직접 만들어가던 와중에, 시민들의 시위를 막으려던 정부군의 최루탄을 맞고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죽음은 6월 항쟁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폭발적으로 시민들의 참여를 만들어내게 되었고, 이한열 열사가 6월 9일에 돌아가신 후 그 다음날인 6월 10일에 가장 큰 규모의 민중 대오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마치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 1970-80년대의 광범위한 노동자운동을 만들어냈듯이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8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한걸음 앞당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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