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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학기 이한열 장학금 수여 학생, 그 네 번째 글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2-09-07 00:00:00 조회 : 3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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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계속 글이 올라오니 오늘은 어떤 글일까 기대되죠?? 이한열 장학생 네 번째 글 입니다! 개인적인 신상은 공개하지 않기 위해서, 신청서에서 신분이 드러나는 글은 제외가... 잘되었나 모르겠네요ㅠㅠ 정말 열심히 살아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도 열심히 살아보아용~>< 1. 이한열 장학회의 선발 기준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하신 분의 가족, 사회적 약자, 깨어있는 시민, 사회적 기업에 대한 구상이 있는 자입니다. 자신에게 해당하는 부분을 적어 주십시오. 하나 이상 해당 하는 경우 모두 적어 주십시오. 저의 아버지의 성함은 OOO입니다. 과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시절에 독재정권에 저항하기위해 민주화운동을 하셨고, 감옥에 가셔서도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시를 쓰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독재저항에 힘을 실어주셨습니다. 저는 부모님이 항상 이 땅의 민주화와 현재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항상 말씀해주셔서 서울에서 떨어진 강화에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다니고 있는 성공회대 영어학과에 들어온 이유도 영어를 배움으로써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좀 더 세계의 언어로 직접적으로 접하고 싶어서였고, 또한 영어란 하나의 국제 언어와 함께 현재 사회과학부에서 사회학을 복수전공으로 하여 사회를 자세하게 공부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2011년에 저희 학내 교류프로그램인 ‘피스보트’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세계 여러 친구들과 함께 파시즘의 역사, 사회주의, 개발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가지고 전세계를 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공부하고 토의하고 어떻게 해야 이 문제들의 인식을 알리고 사회적으로 알릴 수 있을까라는 고민들을 항상 해왔습니다. 또한 배안에서 Big Issue 일본 사장과 함께 우리가 사회적 기업을 구상하는데 어떤 생각들을 지녀야 하는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크게 많은 사회적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대학교에 들어와 대학 YMCA활동을 하면서 서울 대학생들과 또는 전국 대학생들과 같이 여성, 인권, 정치, 역사에 대해 고민하며 우리가 이런 문제를 어떻게 타파하고 해결해 나갈 것이냐를 고민하였습니다. 작년까지는 YMCA에서 소개를 받아 ‘난민인권센터’에서 번역 봉사를 하면서 세계난민들의 실태와 이를 돕기위해 국내, 국외에서 어떻게 구조를 하고 그들을 위해 어떻게 실질적으로 돕는지 알게되는 좋은 공부가 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재는 사회적 기업의 정신과 구조를 공부하기 위해서 국내에서 대표적인 사회적기업인 아름다운가게에서 이번 3월부터 봉사활동을 하면서 교실에서만 공부하는 것이 아닌 실질적으로 보고 행동하면서 배우는 공부를 봉사활동을 하면서 배우고 있습니다. 가정형편을 말씀드리면 현재 외아들인 저를 홀로 키우시던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역할을 하시면서 강화에서 학교를 다니시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교직에서 물러나십니다. 돈으로 생각한다면 굉장히 물질적으로 힘듭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굉장히 풍족한 삶을 살았고 지금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강화에 있는 ‘마리학교’의 전신인 마리서당에서 시를 공부하고 마을 사람들, 자신의 주변 사람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생각하고 공감할 수 있는 법을 배워 남들보다도 풍족한 마음을 지니고 있고, 그 정신을 이어 그 때 공부하던 친구들과도 여전히 잘 지내고 우리가 이 사회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피스보트에서 만나 친구들과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넓은 인간관계로 저와 주변사람들 간의 끈끈한 유대감을 가지며 놀기도 하고 우리사회 내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공유하며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지금까지 공부하고 공감, 소통하며 느껴왔던 것들을 밑바탕으로 더불어서 잘살고 사회 구성원 한명 한명이 주체적인 삶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고 앞으로의 제가 가질 직업에서도 그러한 방면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 이한열 열사, 또는 6월항쟁에 대해 아는 대로 기술하십시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제체제 속에서 1987년 전두환은 장기집권을 하기 위한 일들을 준비 중에 있었고, 그 와중에 국민들은 민주화를 갈망하며 운동을 계속 해왔었습니다. 같은 해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규명하기 위한 범국민적인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6월 9일 연세대에서 열린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의 결의대회가 있었고, 시위를 하던 중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에 재학중이던 이한열 열사는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에 사망하게 됩니다. 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시위에 나선 한 대학생이 길거리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이 사실과 그 이전에 발생하였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또 전두환 정권의 횡포에 대해 모든 국민들이 분개하고 분노 하였고 이런 것들이 6월 항쟁을 전국민적인 운동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열사는 광주에서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왔으며 중학교 2학년 때 벌어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보고 학생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 후 연세대에 입학을 하고 학내 학생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간부로도 활동을 하고 운동을 하다 결국 사망하였습니다. 1987년 이전에도 4월 혁명과 광주에서의 5월 항쟁이 있었지만 6월 항쟁은 조금 더 범국민적인 항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도 점점 더 커지고 있었고, 위에서 말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이한열 사망사건 등 여러 가지 사건들이 같이 발생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치솟을 만큼 치솟았습니다. 6월 10일 이후로 학생을 비롯하여 거리의 많은 사람들이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항쟁의 의미로 흰 수건을 흔들기도 하며 6월 항쟁에 참여하였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조금씩 더 많은 사람들이 6월 항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학생운동의 의미가 컸던 6월 항쟁이 일반 회사원들과 일반 시민들의 참여가 활성화 되면서 시민 항쟁의 성격으로 변화해갔던 것입니다. 6월 26일에는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 되었고, 이 시위에서는 더 10월의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항쟁의 열기를 더 불타오르게 했습니다. 이런 항쟁에 힘입어 6월 29일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되고, 이로써 수년간 계속 되었던 독재가 마무리 짓게 됩니다. 6.29 선언을 통해 그 동안의 유신체제가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새 헌법개정을 통해 직선제로 바뀌면서 그 동안의 군사독재정치의 종식을 고하게 됩니다. 그리고 6월 항쟁을 통해서 그 전까지 학생운동 중심이었던 사회적 운동들이 범국민적 운동으로 성장하고, 이것이 기반이 되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형성하는 큰 발판이 마련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숨겨져 있었던 사회적 문제들을 6월 항쟁 이후로 전국민적으로 사회, 정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으로써 사회 곳곳에서 시민운동이 더욱더 활성화 되어 노동자, 여성, 빈민 문제 국민전체가 사회 전반적 문제들에 대한 인식들이 커졌다는데 큰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6월 항쟁은 오랜 독재정권 속에서 많은 국민들이 독재에 대한 저항을 하여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국민들 스스로 얻었으며, 이를 통하여 국민들이 독재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주체적으로 나라와 사회를 만들었음에 큰 의의가 있으며, 나아가 항쟁이후 우리나라 시민사회운동 형성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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