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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학기 이한열 장학금 수여 학생, 그 세 번재 글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2-09-06 00:00:00 조회 : 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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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한열 열사의 정신을 오늘날 학생들에게 전하기 위해 진행하는 이한열 장학생 세 번째 글 입니다! 개인적인 신상은 공개하지 않기 위해서, 신청서에서 신분이 드러나는 글은 제외하였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아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도 열심히 살아보아용~>< 1. 이한열 장학회의 선발 기준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하신 분의 가족, 사회적 약자, 깨어있는 시민, 사회적 기업에 대한 구상이 있는 자입니다. 자신에게 해당하는 부분을 적어 주십시오. 하나 이상 해당 하는 경우 모두 적어 주십시오. 1. 제 아버님께서는 A대학교 OO학번이십니다.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평화문제연구회]라는 써클을 통해 학생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1981년 11월 25일 학내 시위 도중 연행되어 육군 제 5사단으로 강제징집되었습니다. 2. 육군 5사단에 강제징집 되신 후 1982년 학교 친구들에게 전두환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투쟁을 호소하는 편지 사건으로 보안사령부에 체포되어 후암동에 있는 보안사령부 공작분실과 서빙고동에 있던 보안사령부 대공분실에서 40여일 간 모진 고문을 받고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사실이 있습니다. 3. 아버지께서는 군사재판에서 징역 1년 6개월과 자격정지 2년을 선고 받았지만 관할 사단장의 형 경감으로 집행유예가 최종 확정되어 다시 군복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4. 아버지께서는 군대를 만기 전역한 후 복학을 하지 않고 노동운동에 투신하셨습니다. 인천 부평의 후지카대원전기, 세원산업 등에서 해고를 당하고 [인천지역노동운동연합] “해고자투쟁위원회”위원장으로 활동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에서 중앙위원 겸 기관지 “노동자의 깃발” 중앙편집위원으로 활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5. 또 지난 2007년부터는 “7080민주화학생운동연대”라는 사회단체에서 운영위원 및 사무총장으로 활동하고 계시고 사단법인 “6월민주항쟁계승기념사업회” 이사로, 또 “시민정치천인위원회” 공동대표로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열심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6. 아버지께서는 저를 어렸을 때부터 홀로 키워주셨고, 지금은 저와 87세 되신 할머니를 부양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지난 2008년 말에 실직하신 이후 아직까지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어려운 생활을 꾸려오고 계십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책을 읽으면서 자랐고 그 덕분에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제 생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시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다니고 있는 사회복지학과도 아버지와 상의해 제가 결정한 진로입니다. 제가 열심히 공부하고 더 활동해서 앞으로 사회적 약자를 지원하고 도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 이한열 열사, 또는 6월항쟁에 대해 아는 대로 기술하십시오. 제가 알고 있는 이한열 열사께서는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 시위 때 경찰이 조준발사한 최류탄을 맞고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6월 항쟁은 아버지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으며, 저도 아버지와 같이 기념행사에 참가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 그리고 이한열 열사의 죽음과 6월 항쟁은 1980년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고모님도, 그리고 제 아버지도 전두환 정권 때문에 학창시절을 포기해야 했으며, 이한열 열사의 학창생활과 죽음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글로 배우고, 또 아버지나 고모님으로부터 얘기를 전해들은 것에 불과하지만, 저희들로서는 그저 머리 속에서 상상만 할 뿐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인해 6월 항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또, 제 고모님이나 아버지 같은 분들, 무수히 많은 이름 없는 분들의 노력이 더해져서 저희가 이렇게 공부하고 자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경제 선생님께서 아마도 전교조 선생님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많이 배우고 토론했었습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정말 학교 좋아졌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저희가 그렇게 자유롭게 공부하고 토론하게 된 것도 다 이한열 열사의 의로운 죽음이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도 뵌 적이 없고, 또 6월 항쟁을 상상으로만 하지만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희생하신 분들의 덕택이라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