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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학기 이한열 장학금 수여 학생, 그 두 번재 글
글쓴이 : 관리자 등록일 : 2012-09-04 00:00:00 조회 : 2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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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한열 열사의 정신을 오늘날 학생들에게 전하기 위해 진행하는 이한열 장학금 관련 수여 학생 글 입니다! 개인적인 신상은 공개하지 않기 위해서, 신청서에서 신분이 드러나는 글은 제외하였습니다^^ 두번째 글 입니다. 1. 이한열 장학회의 선발 기준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하신 분의 가족, 사회적 약자, 깨어있는 시민, 사회적 기업에 대한 구상이 있는 자입니다. 자신에게 해당하는 부분을 적어 주십시오. 하나 이상 해당 하는 경우 모두 적어 주십시오. 저는 사회적 약자와 깨어있는 시민 부문으로 장학금 신청을 하고자 합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갑작스레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는 공사판으로 일을 찾아 나서기도, 기계를 마련해 붕어빵 장사를 하기도 하셨습니다. 단속반에서 나와 기계와 가스통 을 전부 차에 실어갈 적이면 망연자실해있는 아버지 옆에서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하던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친척들의 도움으로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수능이 끝난 후부터 학원건물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까지 아빠에게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기에 새벽에 눈뜨면 부랴부랴 학원 청소를 하고 학교에 갔습니다. 주말에는 푸드코트에서 설거지 알바를 하며 나름의 노력을 하였으나 교재비, 교통비에 식비까지 하면 등록금을 마련하기는커녕 용돈으로 사용하기에도 벅찼습니다. 그렇게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다 문득 허무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청춘이라고 말하는 시절을 나는 나의 꿈에 대한 고민, 캠퍼스 안에서 선후배들과 만들어가는 추억이 아닌, 오직 돈을 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학비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았느냐고 하면 또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학비 걱정에 허덕였고 나와 아빠도, 그리고 언니도 열심히 살았지만 끝이 없는 쳇바퀴를 돌 듯 희망은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열심히 살았지만 내가 살았던 삶은 뜨겁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2학년 무렵 학생회에 들어갔습니다. 후배, 동기들과 함께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적 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냈습니다. 등록금은 우리 혼자 감당해야할 것이 아닌, 당당히 요구하고 맞서 싸워 함께 해결해야한다고 외쳤습니다. 캠퍼스 밖을 나와 더 많은 친구들과 함께 등록금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08년도 촛불의 열기 속에서 우리 국민 다 죽이는 한미FTA가 중단될 것을 외치며 뜨거운 광화문 거리를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누볐습니다. 물대포에 맞고 전경에게 쫓기며 온 몸이 물과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행복했습니다. 내 심장이 뜨겁게 요동치며 내가 살아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농활을 다니며 농민들의 삶을 느끼고, 희망버스 대열에 올라서며 노동자들의 삶을 느끼며 중요한 한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이 땅을 살아가는 민중들이 함께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란 걸 말입니다. 졸업하지 않고 아직까지 학교 활동을 하는 저를 염려스럽게 바라보는 가족들의 시선이 가끔 버겁기도 하지만, 우리 학교 친구들이 좀 더 행복했으면 좋겠고 더 나아가서 이 땅을 살아가는 99퍼센트의 민중들이 돈 때문에 고통 받는 일 없이 세상의 주인주체로 당당히 살아가는데 제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이한열 열사, 또는 6월항쟁에 대해 아는 대로 기술하십시오. 87년 6월은 제가 태어난 해와 달이기도 합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희망이 민중들의 가슴 속에 움틀 겨를도 없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 아래 민중들은 또다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군부 독재에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전두환은 박정희 시절부터 지역적으로 차별을 받아왔던 광주의 땅을 군인들의 군홧발로 짓이기기 위한 ‘화려한 휴가’ 작전을 펼칩니다. 전두환 정권의 지시 아래 공수부대원들은 농아였던 최초의 희생자를 기점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다치게 하였습니다. 무고한 시민들은 자신의 친구와 자신의 가족이 무고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살기 위해 함께 힘을 합쳐 무장봉기합니다. 서로 주먹밥을 나누고 여기저기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고자 헌혈의 행렬을 이어갔습니다. 드디어 공수부대가 퇴각을 선언하고 시민들은 서로를 부둥켜 안고 기뻐하지만 그것도 잠시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금남로 일대에 시민들은 공수부대원들이 쏜 총에 맞고 하나 둘 쓰러져갔습니다. 그러나 전두환의 개나 다름없던 언론에선 스포츠와 코미디 프로그램만이 흘러나올 뿐 광주에 대한 어떠한 보도도 나오지 않았고 이에 분개한 시민들은 광주MBC를 불바다로 만듭니다. 결국 끝까지 광주를 지키고자 도청에 모여 있던 시민군들이 최후의 죽음을 맞으며 광주항쟁은 막을 내립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였나요. 학살 정권을 향한 각 계급들의 목소리를 드높아집니다. 학생, 노동자, 농민에 이르기까지. 호헌철폐와 독재타도, 미국 반대를 외치며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학살정권을 끌어내리기 위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합니다. 그 가운데 학생 계급의 투쟁이 있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을 밀착해서 감시하고 폭력을 행사하였으나 그럴수록 학생들은 더욱 강력히 연대하며 투쟁의 목소리를 드높였습니다. 어떤 일도 갑작스럽게 일어나진 않듯이 6월 항쟁도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민중들은 절망하기보다 희망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6월 항쟁이 있기 하루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에서 결의대회가 진행됐습니다. 연대생이던 이한열 열사 역시 투쟁의 대오에 합류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경찰이 쏜 직격탄을 맞게 됩니다. 우리가 교과서, 책에서 많이 보아온 사진에서 이한열 열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한열 열사는 민주화의 봄을 함께 맞이하지 못한 채 7월 2일 숨을 거둡니다. 이한열 열사가 살아온 스물 두 해의 삶을 마감하고 만 것입니다.연세대에 갔다 이한열 열사의 사진이 계단에 걸려있는 모습을 보며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넋이 나가있던 스물 두 살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나 역시 학생 운동을 하고 있지만 치열하게 살지 못할 적도 있습니다. 가끔은 어리석은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열사정신계승이라는 구호적인 말이 아닌, 열사가 돌아가시기 직전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은 어떠하였을지, 열사가 이루고자하던 꿈은 어떤 것이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상기시키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 나이 스물여섯. 이한열 열사의 나이보다 4년을 더 살아온 나는 어떻게 살아오고 있는지, 내 삶은 치열한지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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